★아스타를 향해 차구차구 <크리스마스를 향해 차구차구> 합작 공개★
크리스마스를 향해 차구차구
후기가 뒤에 있어야하는데 앞에 있는 점, 죄송합니다.. 뒤로 보내고 싶은데 잘 안 되네요ㅇㅅㅠ 본론은 이게 아니라, 예정했던 공개일이 하루 늦춰져 12월 26일이 되었지만 참 보람찬 합작을 주최한 거 같아 뿌듯하였습니다! 합작 참여해주신 21분! 정말정말 감사드리고 합작 공개 날짜가 늦춰진 점 정말 죄송합니다ㅠㅁㅠ
그리고 네임표에 공들여주시면서 지각자 이셨던 아이리님!
정말 감사합니다ㅠㅁㅠ!
편집하는데 응원해주신 분들도 정망정말 감사드려요8ㅅ8)/♥
연말이 다가오면서 시내에 즐비하게 널려진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다보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전구가 칭칭 감긴 삼각형 모양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전나무를 본떠 만든 인조나무였다. 하늘과 가까운 가지일수록 더 짧은 가지. 그래서 그늘이 크게 생길 일도, 그 아래에서 휴식을 취할 일도 없었다. 그 인조나무는 오직 겨울의 크리스마스를 위한 나무일 뿐이었다. 다보는 모든 나무가 크리스마스 트리였으면 좋겠다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머무는 나무가 크리스마스 트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야, 빨리 안 오고 뭐하냐?"
그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메이르가 서 있었다. 며칠 뒤면 건장한 성인 남성이 되는 메이르는 전보다 더 인기가 많아져 길거리를 나설 때 빵 모양의 뉴스보이캡을 쓰고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했다. 오늘은 선글라스 대신 목도리를 두르고 나와 있었다.
"뭐냐, 너.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니잖아."
"춥단 말이야."
"이 정도 추위로 벌벌 떨다니 축구선수 되기는 글렀네, 너도."
"나 이미 축구선수거든!"
다보는 메이르와 실랑이를 벌이는 일을 몇 년씩 하다 보니 어느새 이런 일들이 장난처럼 느껴졌다. 재미있었다. 언제나 꼬리를 내리고 져주는 건 다보였지만. 처음 메이르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이렇게 단둘이 외출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기 힘든데. 옛 생각에 잠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가 그렇게 웃겨?"
"그냥. 넌 몰라도 돼."
"흥. 뭐, 그래. 그러든지 말든지…. 아, 근데 너 언제 들어올 거야?"
"아…. 그거?"
"그래, 그거."
잠시 과거로 도망치려고 했던 자신을 메이르가 다시 현재로 잡아당겼다. 더는 지체할 수 없는 19살의 겨울이다.
"우리 팀으로 와. 내가 감독님한테 잘 얘기해놨으니까."
"네가 이렇게 신경 써주다니…. 생각 좀 해볼게. 나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계속 놀고 있으면서 또 시간이 필요하냐? 빨리 정하고 네 동생이랑 같이 놀아줄 시간이나 만들어, 바보야."
논 게 아니라 알바한 거거든. 메이르의 말에 대꾸하려다 다보는 입술을 다물었다.
다보는 아직 이적할 팀을 정하지 못했다. 내년이면 주니어가 아니라 성인 팀에서 뛰어야 했다. 타이거 킹즈가 아닌 다른 팀에서 하는 축구. 돌핀 위너스가 해체될 때도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한번 마음을 둔 곳인데 어떻게 쉽게 마음이 변할 수가 있지? 민우와 다른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타이거 킹즈로 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보는 변하는 게 두려웠다. 변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메이르 넌 왜 B팀으로 가지 않은 거야? 거기가 더 센 곳이잖아. 지원도 빵빵하고."
"거긴…. 꽁지머리가 있잖아."
"아, 타오? 타오가 그렇게 보기 싫었냐."
"싫은 건 아냐. 아니, 싫긴 한데…. 어, 음…. 아니, 그게 아니라…. 걔랑…."
갑자기 횡설수설하는 메이르의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뭐라고 하는 거야, 메이르. 똑바로 얘기해봐. 타오가 그렇게 싫어?"
메이르 놀리는 재미가 은근히 쏠쏠한 것 같다고 차구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얼굴이 발개지면서 손을 입에 가져다 대는 메이르가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 그 녀석이랑 좀 더 겨뤄보고 싶어서. 다른 팀이어야지 그 녀석이랑 대등하게 겨뤄볼 수 있어. 그리고 A팀은 엘레멘탈 그룹과 가장 관련 없는 팀이기도 하고…."
다보는 자신보다 5센치는 작은 메이르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보다 조금 작은 키의 남자아이였지만 지금만큼은 자신보다 더 커 보였다.
"녀석은 더 발전하고 있어. 적룡승천도, 팀플레이도 점점 섬세해지고…. 아마 성인 팀에 가면 더 강해질 거야. 본격적인 대결이 될지도 몰라."
언제나 옆에 있던 메이르가 순간 멀어진 것만 같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타이거 킹즈의 스트라이커였다. 다 컸네, 라는 한마디와 함께 다보는 큰 손으로 메이르의 머리를 헝클었다.
스트라이커 타오와 메이르는 서로를 라이벌로 생각할 수 있었다. 같은 포지션이니까.
미드필더인 자신은 무엇일까. 메이르에게 무엇일까. 분명 메이르는 예전과 달리 동료의 소중함을 알고 있지만, 그것 말고 이 아이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몇 년을 함께 지낸 자신의 스트라이커의 마음이 다보는 궁금했다.
'메이르, 너….'
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다 결국 삼키고 말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자신이 없어진 건지, 모든 게 갈팡질팡 혼란스러웠다.
***
타이거 킹즈 부실에 들어가니 파티 준비를 하는 수지, 코코, 유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각자 개성이 강한 여자아이들이라 부실을 꾸미는 것도 제각각이었다. 수지는 알록달록한 헬륨 풍선을 천장에 가득가득 채우고, 코코는 벽에 커다란 도화지를 붙여 크레파스로 산타와 루돌프를 그리고 있었다. 유안은 케이크와 쿠키 같은 음식들을 배치하고 맛집에 온 것처럼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차구를 제외한 나머지 남자아이들은 타이거 킹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하는데 방해꾼이 되지 않기 위해 한데 모여서 심각한 얼굴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 너네 놀지 말고 파티 준비 좀 도와라."
"에이, 다보랑 메이르 벌써 왔어? 알았어, 알았다고~"
핑과 퐁이 투정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라쿤, 바오, 그리고 쏘니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여자아이들 주변을 돌며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난 슈렌이랑 같이 배달음식 좀 더 찾을게. 14명이서 먹을 거라 양이 부족할 것 같아."
민우가 스마트워치를 클릭하며 대답했다.
"14명? 발칸 아저씨라도 오는 거야?"
"아니. 타오가 온댔어."
타오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다보는 메이르를 힐끗 쳐다봤다. 바보처럼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걘 왜 온대? 놀 거면 자기네 팀원들끼리 놀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어쨌든 좀 이따 차구랑 같이 온다고 했으니까 대접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주장이 그렇게 말하니 더 못마땅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불만인 건 불만이었다. 타이거 킹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일주일이 지나면 우리 모두 성인이 되고―빠른년생인 19살 꼬맹이들도 있지만― 각자의 길을 가야 했다. 메이르처럼 성인 팀으로 이적하는 친구도, 공부를 하고 싶어 대학에 진학하는 친구도, 접어뒀던 옛꿈을 다시 펼치려 하는 친구도 있다. 물론 앞으로도 자주 보면서 우정을 나눌 수는 있지만, 타이거 킹즈라는 이름으로 축구를 하고 서로의 어떤 것이 부족한지 지적해주고 경기의 승패를 걱정하면서 부실에 모여 떠드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사적인 불만이지만, 다보는 크리스마스에 타오와 메이르가 만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메이르, 트리 꾸미자."
"어…? 아…, 그래."
'뭘 그렇게 얼빠져 있어.'
마음속으로 외쳤다.
'메이르, 바보야. 설레지 마.'
***
메이르와 다보는 시내에서 사 온 장식품들을 트리에 빈 곳이 없을 만큼 가득 채웠다. 전구와 커다란 방울과 선물 상자 모형들. 그리고 코코가 선물용 끈으로 만든 리본까지.
"이제 전구만 켜면 되는 거야?"
"응. 하나 둘 셋 하면 불 켜볼까?"
"좋아! 코코가 불 켜본다!"
"그럼…."
"하나."
"둘."
"셋!"
전구의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실 문이 열렸다.
"얘들아, 안녕. 오랜만이야."
반짝이는 전구와 함께 메이르의 얼굴에도 스위치가 켜졌다.
***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고약하지. 평소에는 자기 위치에 만족했으면서 금방이라도 빼앗을 것 같은 사람이 눈에 보이면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이 정도로는 충분하다며 합리화해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려 결국은 추한 자신만을 드러낼 뿐인데. 차라리 처음부터 욕심냈었더라면. 차이더라도 먼저 마음을 고백했더라면. 그 녀석보다 더 잘난 인간이었더라면. 스트라이커였더라면.
눈은 타오를 향해 있으면서 곁에 가지 못하는 메이르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평소보다 더 악력이 들어갔다.
“메이르, 나 너희 팀 들어갈까?”
그제서야 메이르는 고개를 돌려 다보를 쳐다보았다. 진작에 그러지 그랬냐며 메이르는 다보를 조금 다그쳤고, 둘이 함께 웃으며 A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걸 저만치 떨어진 타오가 바라보고 있었다.
***
다보에게 메이르는 여름 나무였다. 큰 줄기에서 우후죽순 가지들을 뻗어 하늘을 향하는 나무. 그 가지에서 또 다른 가지들이 뻗어나오고 잎과 열매들이 나무를 더욱 풍족하게 만들었다. 땅의 기운을 잘 받은 튼튼한 나무는 빛을 쬐고 물을 받아 더욱 크게 자라난다. 특히 녹음이 만연한 여름 나무는 더욱 그러했다. 그런 나무 그늘에서 열매를 따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 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나른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나무의 결실을 지켜보는 것뿐이었으니까.
다보는 독립된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야 했던 자신의 나무를 또 옮겨심지 못하고 그 여름 나무 그늘에 그대로 두었다. 대등하게 옆에서 자라지 못할 바에는 그늘에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생각으로.
[타오메이차구] 알면서도 그래 (Peppermint Winter)
Ver. Christmas Edition
This peppermint winter is so sugar sweet
I don't need to taste to believe
What's December without Christmas eve
타오 X 메이르TS <- 차구TS (NL&GL)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무렵의 이야기
◈
하필이면 따뜻한 적도 근처의 나라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12월 24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공항 내부는 춥지 않았지만 코 끝으로 닿는 공기에선 겨울 냄새가 났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그 2주 남짓한 사이에 겨울이란 계절이 한국 땅의 완연한 주인이 되어 있었다. 간만에 얼굴을 보는 발터에게선 연말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발터는 메이르를 반갑게 맞아준 후에 캐리어를 받아들고 공항 앞에 세워둔 세단까지 앞장서서 걸었다.
늦은 저녁 시간이라 어두운 휘장으로 덮인 고속도로 너머로 셀 수 없이 많은 자동차의 붉은 헤드라이트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차가 막히는지 몇 미터 채 가지도 못하고 자꾸 멈춰서는 운전이 답답할 법도 했지만 메이르는 맥없이 카시트에 고개를 기댄 채 창밖만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발터가 손 끝으로 자동차 핸들을 몇 번 건드리다 메이르에게 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1월은 되어야 오실 줄 알았는데."
왜, 라는 말도 없는데 메이르는 그것이 이유를 묻는 질문임을 알았다. 약속이 있어서, 하고 새침한 목소리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약속이라면 차구 씨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로 하셨나요?"
발터는 너무나 당연하게 차구의 존재를 떠올렸다. 차구가 가진 그 존재감이 괜히 우스워져 메이르는 혼자 소리 없이 웃었다.
"차구는 아니야."
"네? 차구 씨가 아니라면… 아, 그때 그 남학생…"
"강차구가 말했구나."
뻔한 이야기의 결말이라는 듯 메이르는 발터의 말을 가로챘다. 자신의 비밀을 누설당한 사람 특유의 화가 난, 그래서 힘을 준 말투였기 때문에 발터는 메이르의 추측에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 의미 있는 시도는 아니었다. 발터에게 메이르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 얘기할 사람이 차구뿐이라는 것을 메이르도 발터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얘기는 하려고 했었어. 내일은 나 혼자 알아서 움직일 테니까."
에스코트는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몇 년을 모셔온 아가씨의 데이트에 방해가 될까봐 몸을 사려야 하는 날이 기어코 오다니 발터는 감격스럽기도 했고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내일은 날씨가 종일 흐리겠지만 눈이 올 확률은 그리 높지 않으니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시는 분들에겐 조금 실망스러운 소식이겠네요. 라디오를 진행하는 여자 아나운서는 아쉬운 듯이 말했지만 메이르는 날씨 따윈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독한 외로움이 신경을 마비시키고 나면 날씨 쯤이야 아무래도 좋다.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 날이 크리스마스든 아니든 특별해질 테니까.
◈
라디오에서 진행자가 말했던 대로 이른 아침부터 하늘을 덮은 먹구름 탓에 세상은 안개가 낀 듯 흐릿하고 캄캄했다. 하지만 기상청의 눈이 올 확률이 낮다는 예보에도 사람들은 눈이 내리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한낮에도 기온은 어는점 저 아래로 내려갔고 체감온도는 더욱 그러했으니 물 분자는 기체도 액체도 아닌 고체로밖에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음을 다들 무심코 알고 있는 것이다.
해가 저물기 직전의 애매한 시간에 메이르는 타오와 만나 영화를 보러 갔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한창 흥행중인 영화를, 그것도 커플석으로 예매한 티켓을 가져온 사람은 타오였지만 메이르로서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사실 잘 몰랐다. 원한다면 영화관을 통째로 빌려 아무도 들이지 않고 제가 보고 싶은 영화를, 비록 그것이 상영중이 아니라 하더라도 골라볼 수 있는 무소불위의 재력이란 드라마에서 보는 것만큼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학생 둘이서 할 일도 없을 텐데 영화나 보고 와. 그렇게 말했던 사람은 바로 차구였다. 영화표를 예매한 사람이 타오라는 사실은 오로지 메이르의 믿음 속에서만 진실인 얘기였고, 감독이 공개하지 않은 영화의 제작 비화처럼 당사자들만 아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차구에게 영화표를 받아서, 그걸로 메이르와 크리스마스 때 데이트를 한다는 소식은 곧 타오의 절친한 친구인 첸에게 전해졌다. 웬만한 일도 무덤덤하게 넘어가는 첸은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뜨며 조금 놀라워했다.
야, 차구 걔는 진짜 대단하다. 니가 잘되기를 어지간히 바라고 있나봐.
그래? 라고 되묻는 타오는 그게 왜 대단하다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친한 친구고 또 그동안 공부만 하느라 연애 할 일이 없었다고는 해도 첸은 어쩐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말았다. 그럼 당연히 대단한 거지, 너 준다고 크리스마스 예매 가능한 날부터 컴퓨터 붙잡고 요즘 제일 재밌는 영화, 그것도 저녁 먹기 전 시간에, 게다가 커플석, 가운데 자리… 넌 진짜 걔한테 밥이라도 사야 돼. 밥만 사야 하는 줄 알아? 절이라도 가서 하라고. 아마 신화 속의 에로스가 사람이 되어서 나타났다면 그 사람은 바로 강차구일 거야. 그렇게까지 말하자 타오는 조금 이해한 듯 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차구의 노력, 그리고 그 노력에 대한 타오의 이해, 첸이 구구절절 설명하던 것들이 사실은 메이르에겐 별 것 아닌 헛짓거리라 생각하니 속에 바람이라도 들어찬 듯 괜스레 허전했다.
"왜 그래?"
그 기분이 표정에까지 드러났는지 메이르가 물었다. 타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야, 라고 짧게 대답했다.
"입장 시작한대, 들어가자."
"응."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기대된다."
"그래?"
"…그 정도로 보고 싶던 건 아니었어."
갑자기 타오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물어오니 꽤나 당황스러웠던지 메이르는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였다. 메이르가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면 그건 거의 거짓말이야, 라고 차구가 가르쳐주었다. 쓸데없는, 이란 것을 어떻게 판단하지, 하고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속으로 반신반의했는데. 그게 딱 지금이구나, 싶어서 타오는 혼자 키득대고 웃었다. 왜 그렇게 웃는 거야? 메이르가 날카롭게 쏘아보았고 딱히 둘러댈 변명거리도 없어서 타오는 그냥, 이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
◈
영화를 보고 나온 메이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떼고 있는 것에서 기분이 얼마나 상기되었는지 읽을 수 있었다. 영화가 썩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첸이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설명했던 차구의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꼭 웃지 않는 공주님을 웃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어쨌든 공주님은 웃었고, 그것은 차구 덕분이었다. 그러니 오늘 집에 가거든 차구에게 전화해서 이 고마움을 꼭 말해줘야겠다고 타오는 다짐했다.
◈
영화관을 나왔을 때 시곗바늘은 여섯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빨려들어갈 듯 차갑고 새까만 밤바다가 하늘 위로 차오르자 도시는 반딧불이처럼 불빛을 피웠다. 그래서 몰려나온 사람들은 자신의 일행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며 찾지 않아도 되었다.
◈
"여기서 을지로까지 어떻게 가?"
식사 역시 공간에 예속된 행위라지만 그래도 그 질문은 정말 뜬금없었다. 애초에 먼저 밥 먹으러 갈래, 하고 물어본 사람은 타오였는데 메이르는 대답 대신 생각지도 않았던 장소의 위치를 물었다. 그럼에도 타오의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깜빡이는 그 하얀 얼굴이 갑자기 그런건 왜, 하고 반박조차 하지 못하도록 상황에 당연함을 부여하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야지… 역으로 가서."
마치 지나가다 길을 물어보는 사람에게 알려주듯 좀 얼떨떨한 기분으로 타오는 대답했다. 메이르는 더 이상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다만 가자, 라고 말하며 타오의 코트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러니까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더니 을지로까지 어떻게 가는지 물었고 지하철을 타야 한다니까 가자, 단 두 글자로 상황을 종료함과 동시에 갑작스러운 장소의 이동이라는, 타오로서는 결코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갑자기 거긴 왜?"
"밥 먹으러."
메이르는 저녁식사를 하러 낯선 서울의 한복판까지 가는 일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메이르의 사고체계는 타오에겐 너무나 멀다. 가자니까 가기는 하겠는데, 그 때부터 영혼이 살짝 빠져나간 사람마냥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이 지상 위로 반 미터 허공을 밟는 듯 했다.
대중교통이라고는 처음 이용해보는 재벌가 아가씨의 눈빛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들을 신기하다는 듯 훑어보았다. 타오가 메이르에게 개찰구 위에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대면 통과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메이르는 그 메카니즘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저녁이라고 다들 어딘가로 나가려고 하는지, 그 북적대는 개찰구 앞에서 결국 타오는 직접 카드를 찍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메이르는 아주 생소한 음식을 먹거나 낯선 언어를 듣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제 카드를─굳이 카드만 뽑아서 댈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메이르는 말을 듣지 않았다─개찰구 위에 대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뭐가 잘못되었는지 삑삑거리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메이르가 놀라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는데 그 때 타오는 저도 모르게 이 애가 이렇게 귀여웠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이상해."
"한 번 더 해봐."
메이르는 타오의 말대로 했고 이번에는 카드가 제대로 읽혔다. 개찰구 사이를 지나오는 동안 메이르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뒤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간단한 걸 제대로 못 해서 미적거리고 있는 메이르를 몇 번이나 힐끔거렸다.
"아… 오늘 사람 많을 것 같은데."
타오가 불안해하며 중얼거렸다. 플랫폼에만 해도 잔뜩 들뜬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그 시장바닥같은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메이르가 왜 이렇게 사람이 많냐고 물었는데, 타오는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사람이 많은 것이 나 때문도 아니고. 원래 그래, 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는데 메이르는 그 대답을 잘 납득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리에 앉기는커녕 끼여서 가지 않는 것에만 해도 감사해야 할 노릇이었다. 사람들이 양 옆으로 서 있다보니 종종 메이르의 등을 치고 지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누군가와 본의 아니게 부딪히기는 함께 서서 가는 타오도 마찬가지였다. 타오에게는 그것이 아주 당연한, 혹은 어쩔 수 없는, 지하철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메이르에겐 결코 아니었다. 그 때마다 메이르는 표정을 찡그리더니 결국 불만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이거 좀 넓게 만들면 안 되는 거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 타는데."
"이 정도면 그래도 사람 많은 편이 아니야. 출퇴근시간엔 이것보다 두 배의 사람은 더 탈 거야. 두 배? 아니면 세 배? 정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낑겨서 가."
"말도 안 돼."
"보고 싶으면 한 번 아침 여덟시 쯤에 나와봐. 그럼 알게 될 테니까. 아침조회 시간에 운동장에 모이는 애들이 전부 이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그래도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니, 참 대단하지?"
메이르가 상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타오를 들뜨게 했다. 메이르는 곧장 타오의 말대로 상상했고 그것이 얼마나 불쾌한 기분인지 구겨진 미간에서 드러나고야 말았다. 타오가 장난처럼 던진 말이라도 메이르의 반응은 하나하나가 진지해서 지켜보고 있는 타오에게는 더욱 코미디 쇼 프로그램 같았다. 텔레비전 안의 사람과 바깥쪽 사람의 현실이 같을 수는 없었다. 메이르가 자신의 세계에 없었던 것들에 경악할 때마다, 타오는 그 똑같은 거리만큼 반대편에 떨어져서, 자신의 상식이 타인에게로 가 비상식이 되는 광경을 아득하게 쳐다보았다. 그것은 꽤 우스운 일이었다.
을지로가 그리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리긴 했는데 메이르는 플랫폼 앞에 덩그러니 서서 앞으로 가려고 하질 않았다. 타오가 이유를 묻자 메이르는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 하나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타오는 왜 메이르가 기어코 여기까지 오고 말았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엔 가벼운 한숨이, 그 다음에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랬구나, 엘레멘탈 그룹에서 운영하고 있는 별 다섯 개짜리 호텔 레스토랑이 이곳에 있는 줄을 메이르가 아닌 다른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
"길, 알겠어?"
"찾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아, 메이르 진짜. 뭔가 너다우면서도 이건 정말이지…"
"왜?"
그야 메이르에게는 기념일뿐 아니라 매일매일 그 곳에서 식사를 한다 쳐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타오는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그런 고급 호텔 레스토랑의 찾아가는 길을 보여주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메시지는 발터가 보낸 것이었는데, 그 끝에는, 길을 못 찾으시겠으면 친구분께 물어보세요, 아마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라는 추신이 붙어 있었다. 차구에게서 발터는 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들었으니, 이 대책 없는 낙관마저도 타오의 행동을 예측한 끝에 나온 결과일 것이다.
알겠으면 얼른 길 안내해 줘, 라고 공주님처럼 도도하게 명령을 내리시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타오는 일단 역 밖으로 나왔다. 몇 번 출구로 나와서 조금 걷다보니 웬만한 아파트보다는 훨씬 높은 건물 앞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곳까지 처음 와 보는 아가씨는 첫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걸어오니까 힘드네. 이렇게 먼 곳에다 만들어놨을 줄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까마득한 호텔 건물을 보면서 꺼내는 투정이라니. 하기야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장소를 이동하는 일이, 그 넓은 세단 뒷좌석을 혼자 독차지하는 메이르에겐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충분히 발터를 부를 수도 있었지만, 아마 타오를 배려한답시고 메이르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그 낯선 존중은 예상치 못한 자극이 된다. 메이르는 죄 없는 천진난만함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만들어주는지 결코 모를 것이다.
◈
이미 아가씨가 오신다는 기별을 받은 종업원들은 가장 최상층의 레스토랑까지 극진한 안내를 해 주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금속 벽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타오는 괜히 옷차림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메이르도 딱히 격식을 차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특유의 기품과 우아함을 익혀온 사람이었다. 청바지에 검은 코트는 메이르와 영화를 볼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지만 왠지 정장을 입고 와야 할 법도, 그렇지만 또 정장을 입고 오면 너무 힘을 준 느낌이 나 그것 나름대로 촌스러웠을지 모르겠다. 무엇을 입어도 별 수 없다는 건, 그 사람 자체가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 같아서 타오는 괜히 속으로 머쓱해했다.
종업원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테이블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대략 사십층 쯤 되는 건물 높이에서 불이 꺼진 하늘, 그리고 동시에 불을 켠 대지를 보는 눈망울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타오가 야경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메이르는 멋대로 두 사람분의 식사를 주문했다. 타오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려 메이르를 쳐다본 것이지만, 눈이 마주쳤을 때 메이르는 괜히 속으로 찔린 모양인지 어차피 코스 요리는 다 비슷비슷해, 하고 어울리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애피타이저부터 시작된 코스 요리는 타오의 상상과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타오가 이런 류의 식사를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 접시에 담겨나오는 양은 쥐꼬리만한데 사용해야 할 포크와 나이프는 왜 그리도 많은지. 고등학생 시절, 가정 수업 시간에 졸지 않기를 다행으로 여겼다. 포크와 나이프는 맨 바깥쪽부터, 냅킨은 목에 두르지 말고 허벅지 위에, 스프는 안쪽에서 바깥으로, 등등을 읊어주던 나이 많은 가정 선생님의 졸린 목소리가 정신을 바짝 뜨이게 해주었다.
사실 음식 자체는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괜히 긴장을 한 탓에 모를 지경이었지만 옆으로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아니 메이르를 보기만 해도 그 너머로 펼쳐지는 서울의 야경은 따뜻한 허브차처럼 마음을 달래주었다. 서울이 넓다는 생각은 별로 해 본 적이 없는데, 사실은 한눈에 담기도 벅찬 곳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메인 요리를 다 먹었을 때쯤 타오는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조용조용한 클래식이 흐르는 와중에 연인들의 모습이 꽤 많이 보였다. 아주 젊은 연인들은 아니었고 당연하게도 타오와 메이르는 이 레스토랑 안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었다. 내가 저 불빛 켜진 땅 위를 열심히 걷고 있었을 때 넌 하늘 위에 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고서 타오는 어딘지 절망적인 그 감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식후 디저트로 나온 따뜻한 커피는 너무 쌉쌀해서 타오의 입에 맞지는 않았지만 긴장으로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었다.
"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이브나 혹은 당일, 그리고 자신들의 특별한 날에 여기에 오고 싶어서 한참 전부터 예약을 한대."
메이르는 제 앞에 놓인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끔 여기에 왔지만, 그런 특별한 날들에 여기 온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어. 그래서 한 번쯤 와보고 싶었어."
메이르의 시선은 타오를 살짝 빗겨나가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야경으로 향하고 있었다. 메이르의 말간 눈동자에는 서울의 모든 불빛이 담겨 있어서 타오는 홀리듯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그 기분이 어떤지 알 것 같아?"
"조금은."
특별한 날,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사람. 클래식 사이에는 은은한 캐롤도 종종 섞여 들려왔다. 그러고보니 공들여 화장을 한 스무 살의 여자아이처럼 도시가 더욱 화려하게 반짝인다 싶었던 것도 바로 오늘이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쁘진 않네."
메이르는 노래하듯 기분을 그려냈다.
◈
메이르는 결국 제 앞에 놓인 커피를 조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커피가 다 식어 차가워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일어섰다. 메이르는 레스토랑을 나서기 전에 지위가 있어 보이는 중년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오는 그 내용을 딱히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식사는 괜찮으셨습니까, 하고 묻는 남자의 질문을 메이르가 예고도 없이 타오에게 떠넘겨 버렸다. 어땠어? 제게 돌아올 줄 몰랐던 질문을 받고 타오는 꼭 변명으로 수습하듯 맛있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하네요. 그렇게 말하는 메이르는 왠지 어른 같았다.
로비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예의를 갖춘 에스코트가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메이르와는 달리 타오는 여전히 어색해 했다. 지하주차장이 아닌 1층 로비 정문으로 나오는 기분이 생소한지 그 때 메이르는 어설프게 웃고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서울 사람이지만 서울 아닌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지, 잔뜩 쏟아지는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메이르는 말했다.
"생각보다 별 거 없지? 이런 곳의 식사도."
타오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맛이야 솔직히 빼어나게 맛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매일 학교 앞에서 떡볶이만 사먹다 갑작스레 끌려온 최고급 레스토랑이 한 번 들렸다고 별 것 없어질 정도로 하찮은 곳은 아니었다.
"내년엔 더 맛있는 거 먹자."
그 말은 타오를, 그리고 메이르 자신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언뜻언뜻 빛나는 인공적인 별빛에 취해서였는지 몰라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내년의 기약이라니.
"그건, 그러니까…"
그리고 메이르는 늘 그랬듯이, 해명할 필요도 없는 그 말에 어떻게든 무슨 말이라도 더 덧붙이려 했고, 사실은 속마음을 들킨 것에 지나지 않은 이 마당에 안 그래도 거짓말이 서툰 메이르가 둘러댈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런 말을 한 것 가지고 엄마 잃은 아이처럼 울기 직전인 메이르가 안쓰럽기보다는 사랑스러워서, 타오는 대신 뒷수습을 해 주기로 했다.
"내년엔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아마 메이르도 좋아할 거야."
"…봐서."
내년 일을 누가 먼저 꺼냈더라 싶을 정도로 새침하게 받아치는 메이르는 아무리 그래도 밉지가 않다. 그래, 봐서. 타오는 순순히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더 볼 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돌아오는 길엔 전철 안 인구 밀도의 차원이 달랐다. 메이르에게 아침 여덟 시에 나오면 볼 수 있을 거라 말했던 광경이 저녁 여덟 시 크리스마스의 서울 도심에서 재현될 수 있음을 타오는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메이르와 그렇게 가까이 붙은 적은 처음이었다. 여기까지 나오자고 한 사람은 메이르인데 눈치는 어째선지 타오가 보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인파에 불편을 겪어 화가 난 건지, 아니면 단순히 붙어있는 상황에 어색함을 느끼는 건지 메이르의 표정만 보고서는 알 길이 없었다. 타오는 별로 길지 않은 5분 정도의 시간에서 영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이 더 빨리 갈 수 없다면 차라리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바랄 때쯤, 운이 좋게도 자리가 하나 비어서 메이르를 앉혔다. 메이르는 자리에 앉아서도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불안함에 떠는 사람처럼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무표정은 더더욱 아닌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디 불편해? 하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내려서야 그 이유를 말해주었는데, 듣고 나니 정말이지 메이르다워서 타오는 그 자리에서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곱 칸이라니 자리가 너무 많아. 네 칸 정도로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자리가 좁으니까, 옆사람이랑 너무 닿을까봐 괜히 신경쓰이잖아.
메이르의 양 옆에 체구가 작은 여자들이 앉았기에 망정이지, 덩치 큰 아저씨라도 앉았으면 아마 볼만한 소란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예기치 못한 사고─지하철에 사람이 많은 것쯤이야 타오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메이르에게는 엄청난 정신적인 피곤함을 안겨준 사고였을 것이다─에 대한 언급은 다행히 없었기에 타오는 그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
역에서 집 앞까지 메이르를 데려다주는 길은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코트 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메이르의 하얀 손은 어두운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쯤이면 그 손끝이 발갛게 얼어있는 것까지도.
저 차가운 손을 잡아서 녹여주면 좋겠지만, 막상 잡으려니 손 잡는 일이 뭐 대수라고 이토록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수능 볼 때도 이렇게 떨지는 않았는데. 차구는 타오에게, 가서 손이라도 붙잡고 와! 하고 장난스레 말했지만 장난으로 할 만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코트 주머니 안에서 꾸물거리던 타오의 손은 결국 메이르의 집 앞에 다다를 때까지 저 혼자 방황하며 땀이 차도록 따뜻해졌다.
저택 앞에 도착해 들어가기 전 메이르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지 조막만한 입술을 계속 달싹였는데, 쉽사리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말을 이루는 주된 감정은 '고마움'이 아닐까 하고 타오는 추측했다. 결국 메이르는 잘 가, 하고 짧은 인사를 건넸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달라고 시위하는 듯한 간결함이었다.
"응.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메이르의 등 뒤로 커다란 대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메이르가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는데, 문득 콧등 위로 작고 가벼운 무언가가 내려와 앉았다. 그것은 콧등뿐 아니라 정수리나 뺨, 어깨 위로 내려앉았고, 또 메이르뿐 아니라 타오에게도, 두 사람뿐 아니라 온갖 것들 위로도 찾아왔다.
"눈…이다."
메이르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굵직한 눈송이들을 보고 있었지만 그 때 타오의 시선은 메이르에게 향해 있었다. 성탄절 아침 일어나보니 머리맡에서 원하던 선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메이르의 얼굴 위로 웃음꽃이 활짝 피어 내려앉았다. 많은 것들을 가진 여자아이는 세상을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으로 구별하는 걸까? 그래서 끝내 가질 수 없는 저 눈송이들을 보면서 거룩한 이상이라도 발견한 듯 행복해하는 걸까? 입술 위나 손바닥 위처럼 따뜻한 곳에 사르륵 안착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는 그것들을 보느라 메이르는 들어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매일을 저렇게 웃을 수 있도록 항상 눈이 내렸으면. 그러나 그렇게 되면 흔해빠진 것을 보고 메이르는 웃지 않겠지. 그것들은 노력해도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릴 테니까. 결국 어쩌다 한 번 내리는 이 눈송이만큼이나 메이르의 웃는 모습 역시 언제쯤 찾아올지 알 수 없는 무언가다. 늘 기대하지만 소식이 없어 기대를 저버리려는 순간에 모습을 내비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고즈넉한 골목 위로 찾아온 난데없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것이 내려오는 저 하늘 위에서는 은은한 캐롤이 피아노 선율을 따라 흐를 것만 같다. 녹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른 눈송이, 그리고 불어오던 바람이 잠시 멈춘 늦은 저녁. 십 대 끝자락의 크리스마스. 한 사람에겐 일상적인 곳에서의 특별한 식사.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타오가 차구를 찾아갔을 때 그 옆에는 메이르가 있었다.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예쁜 얼굴을 망가뜨려가며. 그 구겨진 표정과 달빛보다 더 환하게 웃는 얼굴 사이에는 수많은 시간들이 있다.
얼어붙은 채 밤하늘을 뒤덮은 구름 조각은 끝도 없이 바스러졌다. 그 조각들은 눈꽃이 되어 영영 그치지 않을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계속 쏟아졌다.
◈
"앗, 타오다!"
어두운 골목길, 난데없는 부름에 뒤를 돌아보니 차구가 걸어오고 있었다.
"차구야! 너도 놀다가 들어가는 길이야?"
"응, 그렇지 뭐. 오늘 어땠어? 데이트는 잘 했어?"
"덕분에. 정말 고마워. 메이르가 영화를 아주 좋아했어."
"하하, 당연하지! 누가 고른 건데."
"어떻게 그걸 고른 거야? 메이르는 나한테 무슨 영화가 보고 싶다는 식의 얘기는 안 하는데."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는 차구도 마찬가지였다. 글쎄, 어떤 사람의 기호나 취향을 알기 위해 필요한 조건 자체는 그리 까다롭지 않다. 그것은 수백 마디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좀처럼 제 얘기를 하지 않는 메이르를 알기 위해서는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타오는 가늠할 수 있을까, 너무나 쉽게 메이르를 사로잡아버린 타오라면 영원히 모를 수도 있겠다. 금성이 궤도로 접어드는 달에는 사랑이 찾아온다는데, 타오의 금성은 항상 궤도를 빙글빙글 돌 것이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 절대자는 모든 일에 노력하는 타오를 가상하게 봐주어, 사랑만큼은 항상 충만할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줄 테니까.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뭐… 난 어쨌든 메이르의 가장 친한 친구니까."
친구라는 단어는 스스로 메이르와 차구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차구는 메이르의 친구로서 물었다.
"그래서, 메이르도 즐거워했어?"
"그런 말은 안 했지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참, 타이밍 좋게도 메이르가 들어가기 직전에 눈이 내렸는데, 그 때 정말 환하게 웃었어. 사실 난… 그 때 메이르한테 한 번 더 반한 것 같아."
이제 곧 성인이 될 타오는 여전히 수줍은 소년처럼 제 마음을 조심조심 풀어놓았다. 눈송이를 품고 불어오는 바람이 점점 거칠어져 타오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차구는 옆에 따라붙지 않고 있었다.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니 차구는 다섯 발짝 정도 뒤에 서 있었다.
"차구야?"
"그거 정말… 정말로 좋았겠다."
멀찍이서 길을 닦는 가로등의 불빛이 차구의 정수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차구는 꿈꾸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메이르의 친구, 라고 말하던 차구는 그 곳에 없었다. 그것은 그림자가 되어 밤의 어둠에 묻혀버렸다.
하지만 타오가 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차구가 내세우는 그림자일 뿐이었다. 정작 눈 앞에 자신의 거울처럼 서 있는 차구를 끝내 발견하지 못한 채로.
◈
밤새 내리던 눈은 결국 그쳤지만 길 위로, 지붕 위로, 담장 위로 도톰하게 쌓여 있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투명하게 갠 하늘 아래에서 세상은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빛났다.
징글벨 징글벨.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펴지고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펑펑 내렸다. 오늘은 몇 년 만에 한번 있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차구는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서서 내리는 눈을 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연인들이 손을 잡으며 걸어 다녔다.
'타오, 늦네.'
차구는 손목에 있는 스마트워치를 보았다. 약속시간은 2시. 지금은 벌써 3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전화해볼까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멀리서
"차구야~"
라고 부르면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타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 오기 전에 볼일이 있어서. 그거 하느라 늦었어."
"설마 화장실?"
"아니야!"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당황하는 타오를 보고 차구는 풋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타이거킹즈가 주니어 아스타컵에서 우승하고 나서 1년. 차구도 타오도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다.
각자 다른 중학교가 되긴 했지만 차구는 감독으로써 타오는 선수로써 학교에서는 유명인 이였다.
특히 타오는 더더욱. 뭐 유명한 이유에도 여러 가지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오래 기다린 거 아니지?"
"음.. 한 30분쯤?"
"약속시간에 정확하게 왔구나."
"그러는 타오는 약속을 잡아놓고는 정작 당사자가 늦어?"
장난기 묻어나는 말투로 말하는 차구를 보면서 타오는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며칠 못 본건데 차구의 말이 행동이 이렇게 그립다니.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게 다 좋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차구의 손을 잡았다.
"빨리 가자. 좀 있으면 영화 시작해."
"늦은 건 타오면서."
말하는 건 약간 심술 끼가 묻어 있었지만 정작 손은 푸르지 않고는 묵묵히 타오를 따라 영화관 쪽으로 걸었다.
영화관에는 크리스마스라서 그런지 사람들로 꽉차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남녀 커플 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꺼지면서 영화가 시작됐다.
차구가 하도 이걸 보자고 졸라서 보게 된 영화지만 정작 당사자는 영화가 중간쯤 넘어가자 꾸벅꾸벅 졸더니 결국은 타오 어깨에 기대서 잠들고 말았다.
영화에 집중하고 있던 타오는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는 게 느껴져 옆을 보자 차구가 자기 어깨에 기대서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타오는 조용히 웃으며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차구가 편안하게 잘 수 있도록 차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차구는
"역시 딴 걸 봤어야 했나?"
라면서 심히 고민중이였다.
영화관 밖에는 아침부터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영화를 보러 들어갈 때만 해도 펑펑 내리던 눈이 그치고 지금은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우리 이제 뭐할래?"
저녁 먹기까지는 꾀 시간이 남은걸 보고 타오가 차구한테 물었다.
차구는 고민하는 듯하다가
"바다! 겨울바다 보러가자!"
라고 말했다.
---
버스를 타고 20분. 창밖으로 바다 풍경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서 본 풍경은 창밖으로 본 풍경보다 훨씬 예뻤다.
눈이 쌓인 모래사장. 그 옆에는 넘실대는 바다.
차구는 모래사장으로 내려가 바다를 따라서 걸었다.
그 옆에서 나란히 타오도 같이 걸어갔다.
뽀드득 뽀드득.
쏴- 쏴-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눈 밟는 소리와 파도치는 소리를 들으며 바닷가를 걸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말없이 바닷가를 걷다가 차구는 갑자기 멈춰서 옆에서 걷고 있던 타오의 모습을 보았다.
한참동안 가만히 타오의 모습을 본 차구는 고개를 돌려 바다를 쳐다봤다.
"역시 예쁘네."
"응, 그러게."
"여름에 놀러 온 거랑은 좀 느낌이 다르다."
"응, 사람도 없고."
"들리는 건 파도소리랑 눈 밟는 소리뿐이고 뭔가 이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거 같다."
라고 말하며 헤헤- 웃고는 머리 뒤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타오 쪽을 보면서
"바다 오길 잘했지?"
"응."
"맨 처음은 너랑 같이 오고 싶었어. tv에서 한번 본적 있는데 정말 예뻤거든."
그 말에 타오는 미소 지으면서
"그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들어도 되는 거지?"
라고 말하자
"뭐 그렇지. 요번 크리스마스는 화이트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앗 이거다! 하고 생각한 건데 마음에 들었으려나?"
라고 차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차구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타오는 못 당해내겠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응. 정말 맘에 들어. 차구 네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런 걸 준비하다니 대단하네!"
라고 말하고는 웃으며 차구 쪽으로 다가갔다.
"그럼 이제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 줄 차례네. 차구야, 눈 좀 감아볼래?"
차구는 고개를 갸웃 하다가 눈을 감았다.
"(쪽-)"
"에-?"
차구는 입술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에 눈을 크게 뜨며 타오를 바라봤다.
"풉- 얼굴 빨개졌어. 이번엔 장난 안치고 진짜로 줄게. 다시 눈 감아봐"
차구는 볼에 바람을 넣으며 타오를 살짝 째려보고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몇 십초가 흘렀을까 점점 가까워지는 숨소리에 차구는 눈을 뜨려고 하자
"아직 눈 뜨지 마."
라고 타오가 말했다.
그리고 귀에 뭔가 차가운 게 닿았다.
"자. 이제 눈 떠도 돼~"
차구는 눈을 뜨고는 타오를 바라보며 귀를 만져봤다.
"응? 귀걸이?"
"응. 아! 혹시 귀걸이 하는 거 싫어해?"
"아니 아니! 근데 다른 한쪽은?"
차구는 반대쪽 귀를 만져보며 아무것도 없는 걸 느끼고 타오에게 물었다.
"아~ 다른 한쪽? 다른 한쪽은 여기"
타오는 웃으며 머리를 뒤로 넘겼다. 거기에는 조그만 원으로 된 은색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가만 보니 가운데에 조그맣게 'ㅌ' 라고 새겨져 있었다.
차구는 그걸 보고 나서 아마 자신에게는 'ㅊ' 이라고 새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니셜 새기느라 좀 늦어져서 말이야. 아까 늦은 것도 그거 받아오느라 좀 시간이 걸렸어. 역시 이맘때쯤은 사람이 많더라.
반지나 목걸이로 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눈에 너무 띄잖아. 그래서 귀걸이로 해봤는데 어때?
아 그리고 그거 자석으로 되어 있는 거니까 귀 안 뚫어도 돼. 뭐랬더라? 귀찌라고 했던가?
어때? 마음에 들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차구와 달리 타오는 차구의 귀를 보면서
"역시 머리가 짧으니까 눈에 띄네. 제일 작은 걸로 했는데도. 따른 걸 했어야 했나. 그래도 커플로 뭔가 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한 건데……."
라며 시무룩했다.
차구는 시무룩해하는 타오를 꼭 껴안으면서
"고마워 타오! 그래도 역시 밖에서는 못하겠다. 눈에 띄면 좀 곤란하니까."
라고 말하면서 타오한테서 떨어졌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괜찮겠지? 정말 고마워!"
하고 웃으면서 타오 입에 살짝 입술을 맞추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 뒤에서 갑작스런 입맞춤에 당황해했던 타오가 차구가 걸어가는 걸 보고는 재빨리 뒤쫓아 갔다.
차구를 따라잡은 타오는 옆에서 차구랑 같이 발을 맞추며 바닷길을 걸었다.
어느 샌가 두 명은 손을 맞잡고 있었다.
*체사마구 같은 체사마구 같지 않은
*과거편입니다 00)9
후-
입김을 한 번 불자 하얀 것들이 뭉게뭉게 허공을 떠다닌다. 옅게 내리쬐던 태양은 어디로 가고, 어느 덧 노을이 지기 시작하더니 하늘은 보랏빛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다. 귓가에 울려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롤과 함께 연인들, 혹은 가족들은 각자 손을 잡고 이곳 저곳을 향해 가고 있던 중, 금발 머리의 남성이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법 말끔하게 차려입은 검은색 정장에 심장 부근에 서양호랑가시나무 브로치를 단 것이 인상적인 남자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주무르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반복했다. 언제 오시려나. 남자는 입가에 호선을 그리다 자신의 표정 변화에 흠칫거리곤 아무도 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헛기침을 두 어번 했다.
“ 어. ”
그 순간, 하늘에서는 새하얀 보석들이 떨어지며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남자, 체사는 다른 남자- 강마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강마구,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축구단의 감독을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게 된 이유는 약 일주일 전, 마구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Begonia
체사x마구
맆
“ 저는 가족들이랑 같이 보내려고요. ”
“ 저 이번에 여자친구가 생겨서... ”
선수들에게는 각자 사생활이 존재한다. 경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 뭐라할 권한은 없으며 그는 선수, 체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상황인걸까. 체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강 마구 감독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정을 물어보고 있었다. 남자는 느리게 눈을 껌뻑이다 인기척을 내고는 소파 위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았다.
“ 체사, 너는 크리스마스 이브 때 뭐해? ”
“ 저 말입니까 감독님? ”
크리스마스 이브라, 체사의 경우 특별히 가족과 만날 일정도 없고, 연인도 없기 때문에 일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전에 감독님은 이를 왜 물어보는걸까. 의아한 생각은 들긴 했지만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고 솔직하게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마구는 환히 웃으며 그의 두 손을 잡더니 흔들기 시작했다.
“ 체사, 그러면 크리스마스 이브 때 나랑 같이 식사라도 하겠나? ”
“ 에이 감독님, 체사도 남자인데. 남자 둘이서 식사를 하고 싶겠어요? ”
체사는 눈을 크게 뜨며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갈색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에메랄드 빛 눈이 인상적인 남자, 그의 목소리에서는 당당함이 느껴졌고, 그의 웃음에서는 사람을 홀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구의 약간 거칠긴 하지만 크고 따뜻한 손의 온기가 체사의 피부에 닿고 있었다. 체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지, 오로지 마구만 바라보았다. 그가 나에게 식사를 권유했어.
“ 예, 감독님. 감독님만 괜찮으시면. ”
그의 말에 다들 체사와 마구를 바라보았다. 설마 승낙을 할 줄이야, 마구는 호탕하게 웃으며 체사의 등을 도닥여주더니 크리스마스이브 오후 7시에 보자고. 트리 아래에서 라는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 준비를 하자며 선수들을 다독였다. 너도 참 감독님을 좋아해. 그러다 살림 차리겠다 야. 여기저기서 비웃음은 없는 키득거림이 들리며 체사와 대화를 하다 각자 위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체사는 강마구라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의 굵직한 선, 그의 당당한 목소리, 언제나 다정하게 웃는 모습까지- 체사가 강마구를 사랑하지 않는 부분은 없으며 이 설레는 감정을 숨기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다. 방금 전에도 손을 잡혔을 때 감정이 들켰을까 조마조마 했었는데. 그는 이 사실을 알까. 자신이 경기에서 골을 넣고 난 뒤에 그 누구보다도 감독을 찾아 골을 넣었다고 말한 순간, “잘했어 체사!” 라는 말을 듣고 싶어 안달난 강아지처럼 변한다는 사실을. 그런 와중에 단 둘이서 하루를 보낸다니. 마구는 특별히 의미가 없었겠지만, 체사에게는 둘이 함께라는 사실 만으로 심장 어딘가가 두근거렸다. 크리스마스이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날이 될 것 같았다.
*
오후 6시 30분, 약속시간 30분 전. 아직 마구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다 눈에 들어오는 꽃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부담스럽다며 거절할 마구겠지만, 그래도 이브날 함께 있으니 이정도 선물은 주고 싶었다.
“ 어서오세요. ”
점원의 목소리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꽃을 보다가, 화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꽃다발 같은 것을 선물로 주면 시체로 만들어버리겠지. 체사는 작게 키득거리며 화분들을 이리저리 보다 한 화분을 들었다.
“ 그 꽃은 베고니아에요. ”
점원의 말에 체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계산대로 옮겨 이걸로 주세요, 말을 툭 던지고는 계산을 했다. 아기자기한 꽃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화사함을 남기겠지. 체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봉투 안에 화분을 넣고는 다시 약속장소로 향했다. 6시 45분, 아직 그가 올 만한 시간은 아니지. 체사는 트리 앞에 묵묵히 서있다 어디선가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 체사! 기다리게 했나? 미안하다. ”
6시 50분, 그는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왔다. 아뇨, 저도 별로 기다리지 않았어요 감독님. 체사는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제 손에 들려있던 베고니아 화분을 그에게 건내주었다.
“ 이건 별거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감독님. ”
“ 아니 이런건 필요없는... ”
“ 제 호의니까 받아주세요, 감독님. ”
이런 면에는 단호한 체사였다. 마구는 옅게 한숨을 쉬곤 고맙다고 말하며 화분을 받아 꽃을 바라보았다. 예쁘네, 아마 생각없이 입가에 호선을 그린거겠지만 체사는 그 모습을 보며 심장 어딘가에서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감독님, 감독님. 그와 단 둘이 있기 위해 기다린 일주일, 이렇게 그와 함께 있으니 새삼 설레는 감정이 새록 새록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나의 감독님, 이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그간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오늘은 그에게 내 마음을 전하리.
*
마구가 체사를 데려간 곳은 어느 한 레스토랑이었다. 어느 덧 검게 물들여진 서울의 야경이 보이는 것이 인상적인 전망 좋은 곳, 체사의 연봉을 생각하면 자주 올 수는 있지만 평소 검소한 생활을 보내는 마구가 이런 곳을 데려오다니. 체사로서는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 이런 곳을 아실 줄은 몰랐네요. ”
“ 그래도 이브니까, 한 번 찾아봤지. ”
마구는 제 볼을 긁적이다 조금은 서툰 말투로 메뉴를 주문하며 체사를 바라보았다. 귀여워, 체사는 저도 모르게 말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고는 마구를 마주 바라보았다. 검은 정장에 멋드러진 녹색 넥타이, 입가에 호선이 그려진 그의 모습이 오늘 하루 체사만을 위한 것이라니. 체사는 입가에 호선이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바보같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가족들 보다는 커플들이 더 많아, 남자 둘이서 앉은 것은 체사와 마구 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처량한 솔로들이 찾아온 것으로 보일지, 혹은 동성연애를 하는 것처럼 보일지. 체사는 가급적이면 후자로 보이길 원하지만, 그것은 감독님에게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직 연인 사이도 아닌데 오해를 받으면 껄끄러워 하시겠지.
하지만 이제 한 발자국 나아가야해.
체사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손을 슬며시 뻗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한 순간
“ 체사. ”
마구가 먼저 그의 손을 잡고는 진지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런 그의 표정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표정을 볼 때마다 체사는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손에서 체온이 여기까지 전달된다.
두근
두근
두근.
이제 정말로 말해야한다. 이 감정이 터져버리기 전에, 그가 영영 사라져버리기 전에.
“ 나 결혼해. 결혼 할 사람이 임신 2주라더군. ”
“ ...네? ”
체사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연애를 한다니,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는 경기를 하는 날 외에 특별히 약속시간을 잡는다거나 연인이 있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결혼이라니. 체사는 눈을 크게 뜨며 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이 말을 하고 싶지만, 그는 이미 나비가 되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 너에게 가장 먼저 말해야할 것 같았어. 체사. ”
마구는 체사의 손을 더 세게 잡으며, 엄지로 그의 손바닥 안쪽을 꾹 눌러주었다. 피곤이 쌓여서 그런지, 그의 손길이 묘한 쾌락으로 전달되는 자신이 괜히 미웠다. 체사는 눈을 감다가 뜨며 다른 손으로 그의 손 위를 포개주었다.
“ 축하드립니다. ”
‘ 가지 마세요. ’
“ 결혼하고 애를 낳으면 보러가게 해주시고. ”
‘ 떠나지 말아주세요. ’
“ 역시 감독님이네요, 결혼도 이렇게 먼저 하시고. ”
‘ 사랑해요. ’
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누구의 말인가. 머릿속에서 하는 말과 입에서 내뱉는 말이 전혀 달랐다. 아아, 나는 끝까지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체사는 제 입가에 비릿하게 웃음기가 남았다는 것도 모르고, 바보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체사... 마구는 옅게 웃으며, ‘고마워.’ 한 마디를 하곤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쓸어주었다. 고생이 늘 많아, 에이스로서도. 내 친한 친구로서도. 언제나 고마워. 그는 나직이 한 마디, 한 마디를 체사에게 던져주었다. 네,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 말은 창이 되어 체사의 심장을 찌른다. 어째서, 당신은 저를 떠나는겁니까.
“ 사랑해요. ”
이 말조차 하기 전에... 아, 체사는 자신이 말을 잘못 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난감해하면 어떡하지, 사이가 멀어져버리면, 그가 영영 떠나면.
“ 나도 사랑해. ”
마구는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체사를 바라보았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체사는 마음 속에 혼란이 커피에 우유를 섞듯 맴돌았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인가, 이 말은 에로스적인 의미인가. 아니면 아가페적인- 다른 의미인가. 마구는 눈을 꾹 감더니 손을 놓고는 직원이 따라주는 와인 한 잔을 받아들이곤 고개를 기울였다.
“ ...친구로서. ”
마구는 푸른 말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역시나, 체사는 옅게 웃으며 자신도 와인 잔을 들고는 마구의 와인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건배, 불그스름한 와인을 마구의 입 안을 탐닉하듯 입 안으로, 음미하며- 알코올에 자신을 떠맡기자. 그리고 안녕, 사랑이여. 나의 짝사랑. 그의 맡에 놓여진 베고니아에 사랑을 담아. 안녕.
이것은 그가 나를 처음으로 배신한,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26일의 아침이 싫어."
크리스마스가 시작되기 3일 전 쯤 이였다.
3일 전, 매일 어수선했던 타이거킹즈의 부실은 크리스마스에 맞춰 오늘, 아니 그 때 부터 휴가를 시작했다. 한 사람씩 각자의 집으로 떠나가는 기쁨의 그 과정을 두 눈으로 꼼꼼히 살펴보고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차구는 혼자서 넓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채 앉아 집에 갈 생각은 물론 밖에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듯한 메이르를 유심히 쳐다봤다.
한 숨 밖에 남아있지 않을 고독감과 왠지 모를 건드릴 수 없는 묘하고도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어나가고 있는 고유의 분위기에 차구는 저절로 한 손을 뻗어 메이르를 손짓했지만 그녀는 어느새 고개마저 푹 숙인채 숨을 참아가고 있었다. 색색거리는 작은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정도로 그녀는 질문이 나온다면 민망해질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메이르, 집에 안가?"
그 수 많은 어두운 공기를 청소 먼지털이하듯 빠르게 치워버린듯한 차구의 또박한 목소리가 메이르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딘가에 집중한듯이 조용했다. 익숙한 저 모습. 웅크려진 몸은 겨울나무처럼 덜덜 떨리지는 않았으나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 평소 일반적인 그녀의 거센 고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 무엇보다 예전부터 시작된 익숙하고도 무서운 모습이였기에 차구는 담담하게 조용하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어느새 차구의 깊은 마음 속에는 더욱 더 위험한 일종의 작은 궁금증 유발과 걱정, 답답함이 올라오고 있었다.
"...30분 뒤에."
"뭐? 아, 곤란한데...나 집에 빨리 가고싶거든."
아까운 5분이 지나버렸을까.
마침내 메이르는 힘겹게 입을 떼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내용도 그렇지만 말투도 목소리도 모든게 어둠에 가라앉은 모습이였다. 더 이상은 버틸수가 없었는지
살짝 무언가를 참아가며 힘겹게 말을 꺼낸듯 해 보여 차구는 말을 더 이상 이어나갈수도 없었고 특유의 두 눈동자는 우중충한 회색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약간의 걱정과 내가 잘못한게 있나 하는 생각과 반성 아닌 반성도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이 쯤 되면 메이르 앞에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까지 해야하는걸까. 차구는 수심이 가득했던 예전 엄마의 모습과 지금 메이르 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공통점 중 하나는 왜 그랬는가에 대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 여자들의 감정은 남자들보다 몇 배 더 예민하다는 같은 동네 친하지 않은 친구의 말을 우연히 들은적이 있다해도 이번은 담담함과 함께 파악해서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어떤 억지스런 질문과 추측, 이유를 만들어 물어보기에는 메이르는 조금 지쳐있었고 웃기려는 노력으로 보일까봐. 게다가, 차구 역시 어린아이 였기에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지금 가득 차 있어 이대로 고개숙인 메이르를 버리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불과 1분 전의 이야기. 정말 여기에 놓고 혼자 달아난다면 후에 더욱 더 어둠을 집어삼켜 더 이상 말릴수도 없을 상황이 되어버릴거 같아 경기 때와 같이 망설여진 차구였다.
그래, 30분동안 기다려주는게 좋은 친구의 모습이겠지.
하지만, 메이르가 오늘 부실에서 집에 안 가고 움직이지 않아서 오늘
좀 늦었어요 라고 부모님께 말하면 변명아님 그 나이때 또래 남자아이의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생각하고 금방 넘겨버리거나 메이르에 대해 장난스런 다른 시선, 너 메이르 좋아하니? 등으로 바라볼게 뻔해서. 차구는 발을 조용히 동동 구르며 저절로 부실의 전등을 올려다 보았다.
따갑고 눈부시다.
방 안에 태양이 가득 찬 기분에 미간을 좁혀가며 바라보고 있는데도 메이르에 대한 생각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소리없는 정적이 이어져 시계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도 죽여가고 있었다. 초침의 소리가 여자의 하이힐 소리가 되어 귓 속 깊은곳을 서서히 찢어내고 있다고 해도 차구도 메이르도 그 아무도 누군가의 이런 행동에 거센 반박을 하지 않았다. 편안했다. 편안하지만 어두웠다. 부실의 따가운 조명빛만큼, 공기는 어둠인데도 따뜻했다. 숨 막힐듯 올라오는 정적이 두 사람의 경계선을 넘어버리면 차구와 메이르는 깊은 어둠 속을 긁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차구가 이런 메이르의 돌발적인 행동에도 아무런 대처나 행동조차 하지않는 이유는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본 이유도 타당했지만 경기 중이나 경기 후나 그녀 주위로 느껴지는 외로운 기운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같은 팀원들 조차 그녀의 옛 시절부터 보았던건 아니였지만 그녀의 속 사정을 모르지는 않앗고 심지어 그 누구도 손길을 건네는 용기도 누구에게는 다 없었다. 다가가려는 모든게 불분명해져 더욱 더 혼탁하게 되어버린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결정을 메이르를 제외한 타이거킹즈는 결정을 내렸고 결국 그 바톤은 약속이란것도 없이 저절로 차구에게 돌려졌지만 차구조차 뭐라고 판단할수도 이야기할수도 없었다는 것.
우연히, 부원 중 누군가가 메이르에 대해 굉장히 질려 죽을거 같다는 폭언을 말했던 기억이 차구에게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부원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메이르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도 없이 시간은 그렇게 흘러흘러 이번에는 크리스마스의 3일 전 그녀는 또 다시 고독감을 씹어가며 지금도 차구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꿈이 아니고 상상도 아닌 현실. 손을 꼼지락 거렸다.
전구의 불빛이 반짝임에 맞춰 차구는 금붕어가 되어 심호흡을 내뿜고 있었다. 체감상으로는 30분이 넘어 40분이 흘러가는듯 길고 넓었다.
"집 가는 길 같이 갈래?"
30분이 지났다.
차구가 시계를 끝까지 보고 계획한것처럼 먼저 꺼낸 한 마디.
심호흡이 단 짧은 한 마디로 변환되는 그 순간이였을까. 차구가 먼저 아무런 복잡한 생각없이 말을 먼저 꺼냈다. 방금전처럼 담담했다.
미동이 없어도 멀쩡하게 달려있는 그 두 귀로 들어주기만 한다면 변화는 조금씩 일어날거라고 어린 소년의 동심은 불꽃이 되어 메이르를 따뜻하게 녹이고 있었다. 다른 여자 부원들에 비해 조용하고 말이없고 신경질적이며 예민한 메이르를 조심히 대해야 한다는 남자 부원들의 편견을 버리고 평소와 같은 활발한 목소리로 변화시켜 메이르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메이르는 단단한 바위처럼 소파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다 석상이 되어버린것처럼. 조용했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나아질까. 장난같지 않은 장난 생각같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바보같은 생각에 차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지어버리고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우리집이랑 너네집이랑 가깝잖아."
집에 같이 가서 하룻밤 자고 간다는 말은 아니야.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꼿꼿하게 허리와 어깨를 피며 어른스러운 미소로 메이르를 반겨주고 있었다.
"꼬맹이. 나 오늘 조금 머리가 아파서 그래. 가만히 좀 있어줘."
"에이, 전혀 그렇게 보이지도 않고 말도 잘 하는데?"
"......지금 여기 바닥에 쓰러지면 어떻게 될까."
"119!"
"...멍청아."
아, 심각한게 아니다.
그녀, 작은 아가씨, 메이르는 숨을 불어넣은듯 차구의 농담 어조가 들어있는 말을 자연스레 이어받고 있었다.
그래도 제법 말을 주고받는 거 보면 그렇게 심각한게 아니구나. 차구의 두 눈동자가 점점 색을 찾기 시작햇다. 역시 넌 그런 우중충한 분위기는 처음에만 무섭지이제는 아무렇지 않다니까. 하하. 머리 꼭대기로 빛이 올라오는 기분이라 차구는 손가락으로 코를 쓱쓱거리며
"나 크리스마스에 할일없는데. 메이르도 없을거 같으니까 같이 3일 뒤에 아스타 백화점! 거기 트리 보러 가자!"
사실은 지금 너와 같이 보고 싶은데도.
.
.
.
또 다시 정적.
아.
내가 정말 잘못한게 있는걸까. 트리보러 가자고 한 건데?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런 우울함에 안 속는다고 메이르 우리 타이거킹즈의 스트라이커!
차구는 방금 전 메이르의 모습을 제외한다면 절반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축구실력도 체력도 스킬도 심지어 그녀의 성질지수도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감이라는 걸로 자주 맞추고는 했었기에. 두렵지도 않았고 아무런 욱한 감정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의 적극적이고도 돌직구적인 성격이 가장 크긴 했지만,
"..."
"..."
그렇지만 공기는 흐리지 않은 걸. 그것만은 안심해.
"꼬마, 내가 아직 그 말을 안 했네."
"?"
메이르는 아직도 고개를 들지않고 있었지만, 밖으로 겨우 나온 손이 어느새 꽉 지어져 둥근 주먹모양이 되어있었다. 핏줄이 살짝 보일정도로 세게 쥐고 있었지만, 차구를 때린다던가 하지는 않아 보였다.
"난 크리스마스 싫어."
"헐. 그럼 산타는?"
"크리스마스도 싫고 산타도 싫고 무엇보다..."
"이유는? 메이르...왜...?"
"26일의 아침이 싫어."
26일.
크리스마스가 지난 푸르뎅뎅한 아침.
곁에 누군가가 없는 외로움이 많이 익숙한 그녀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질색이고 싫은건 당연하다고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지나고 난 뒤의 날 마저 싫어하다니 차구는 살짝 메이르에게 의외의 면을 느꼈다. 또한 그 느낌이 뭔지 알거 같아 고개를 끄덕인건 덤.
"그렇다고 그렇게 우충충하게 있을거야? 철 없이?"
"뭐?"
차구의 한 마디에 메이르는 결국 고개를 팍 하고 들었다. 얼굴은 어느새 좋지못한 인상으로 변해있었다. 아니면, 계속 험악한 저 인상을
유지한채 고개를 들지 않았거나, 답답했을텐데 참은거 보니 역시 고집은 세다는 걸 보여주는 메이르의 모습과
"거봐. 그것땜에 우중충해 있었잖아."
"ㅇ..아니야!
방금전과는 다른 시큰둥하면서 가벼워진 차구의 표정.
"...아무튼 난..."
"으음~"
"야! 진지하게 들어봐."
"...왜 그래. 고개 숙이고 있었을때 나도 진지했어."
그런 차구의 표정과 함께 메이르의 힘없이 웅크려져 있던 자세 또한 변해있었다. 이번에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가볍게 턱을 괸 편안하고도 이상한 자세. 차구는 요상스런 웃음보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방금전 메이르 맞냐니 예전 메이르도 매번 이랬는데 지금은 그 때 다 까먹을거 같다 라니 자음 중 하나가 떠오르는듯한 웃겨죽겠다는 말투가 담겨 메이르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26일의 아침이 싫어."
험악한 표정을 다듬고 차구의 두 눈동자를 향해 메이르는, 확실히 자신의 의사와 생각을 표현했다. 차구는 꽤 놀란듯 그 자리에서 멈춰 서 메이르의 묶여진 포니테일만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아이인데도 자기보다 확실히 키가 큰 편이라는 정확한 증거. 이렇게 마주보고 서니 여자아이라고 말하기는 상당히 부담스럽다고, 어린 열 두살 소년의 생각이 부실의 불빛을 감쌌다. 그라운드에서 그녀는 서슴없이 거친 플레이에도 능숙했고 팀을 이끌어나가는 에이스기도 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커 보였기에, 차구는 아무런 말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 때만큼은, 오히려 모르고 있는 척이 나을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차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어느새 메이르의 표정은 사색이 된 채. 다시 턱을 괸채 부실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디데이 3일 전의 노을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우리 인간들과도 같아보였다. 메이르의 두 눈꼬리 끝이 이슬에 젖어버려 사색을 강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차구가 서 있었다. 그라운드에 들어가기 시작 전. 그 때처럼, 선수의 뒷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감독의 모습처럼.
"26일의 아침이 오지않게 하면 되는거 아냐?"
낭창한 차구의 물음에 메이르는 저절로 고개를 돌렸다. 턱을 괸 자세는 풀려나 자유를 찾았는데도.
"크리스마스에 혼자인거 너도 알고 나도 아니까. 한 몇분 전에 내가 말했잖아. 아스타 백화점 트리."
"...못들었는데."
"거짓말 하면 엉덩이에 뿔 난다 메이르."
"...사실은 들었어.'
"그래. 역시 메이르야."
들었는지 듣지않았는지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오직 메이르만 알고있을 뿐.
"며칠 뒤면 바로 크리스마스니까. 네 집 앞에서 먼저 기다려도 되는거지? 시간은 언제 할.."
"..잠깐! 왜 우리집에서 기다리겠다는거야?"
"우리집에서 기다리면 폼이 안나니까."
"..."
"우와! 메이르! 내 부탁 들어주는거야? 오! 고마워!"
"..뭐.....?잠깐, 그..그게 아니라...이건..."
"고마워!"
"아니라니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메이르와 잇몸을 보이며 환하게 웃는 차구, 부실의 불빛은 아직도 따뜻하고 메이르의 우울한 공기는 모두 다 빠져나가 창문 밖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올챙이와도 같던 우울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목격한 차구는 더욱 더 방방뛰며 메이르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마치, 메이르를 위한 산타가 되어버린것처럼. 서프라이즈 선물을 지급한것 처럼 차구는 웃고있는데도 편안해보였다. 홍당무가 되어 더이상 꺼지지 않을것만 같은 메이르를 뒤로 한채. 창가로 빠져나간 예전과 그 전의 그녀의 그림자가 차구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하늘의 노을은 보라빛이 되어가고 있었고 은빛과 금빛이 섞여들어간 성탄의 종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기분에 마음을 내려놓고 메이르를 뿌듯하게 쳐다보고 있는 차구였다. 그 예민했던, 무언가에 어둠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그녀의 옛 모습과 아무도 다가가지 않던 손길이 이제는 날개가 되어서 그녀를 감싸고 있다는 걸. 메이르는 알지 못했다. 예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팀원들에게 좋지 못한 소리마저 들었던 그 옛날 과거의 기억까지도 현재의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인것처럼 보였다.
"약속을 어기거나 하면 다보나 쏘니랑 사귄다고 소문내버릴까~"
장난스럽게 맞받아치는 지치지 않는 이 꼬맹이를 계속 건드려보자니 웅크리고 앉았던 그 때처럼 먼저 지쳐버려서 주저앉은 메이르는,
"...마음대로 해."
"야호!"
차구는 폴짝 하고 개구리처럼 뛰어들었다. 저러다 천장에 머리랑 같이...아니야. 메이르는 사색의 표정에서 조금은 풀려나 심연의 미소를 보이며
차구의 힘이 실린 점프를 뒷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꼬맹이랑 크리스마스라는 건 최악이지만, 왜 인지 모르겠어. 왜 너를 따라가게 되었는지는...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온 부모님과 촛불을 불며 이브를 맞이하고 있던 차구와 조용히 흔들의자에 앉아 코코아를 마시며 내일의 크리스 마스 날씨를 보고있었던 메이르.
그렇게
크리스마스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며칠 전의 자기 멋대로 방식대로 차구는 메이르의 집 앞에 다가와 문을 두드리기도 담을 넘으려는 장난스런 시도도 하며 그녀를 기다렸지만, 메이르는 의외로 일찍 일어나고 일찍 나와 차구를 반겼다. 어느때처럼 미간이 좁혀져 있었지만, 이내 담장을 넘으려는 차구의 모습에 저절로 풀려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서 있는 메이르를 보며 차구는 눈이 휘둥그레 해져 장난스레 메이르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오, 예뻐졌다."
"호들갑 떨지마. 축구 할때 빼고는 원래 이렇게 입어 난."
"우리팀 여자애들은 예쁜 애들이 많다니까~ 물론 나는 다 싫지만."
차구는 두 팔을 뒷통수에 올리고는 메이르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도 까다로운 수석 디자이너의 모습도 아닌 주관적인 자기 생각을 늘어놓기 쉽상이였다. 메이르는 조용히 자기 이마를 짚고는 한 숨을 쉬었다. 오늘 좀 피곤하겠는걸.
메이르의 예상은 적중했다. 아스타 백화점 앞 거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특히 크리스마스의 북적거림을 미처 계산하지 못한 차구.
"이럴 줄 알았으면 집사에게 부탁해서 좀 더 빠른길로 갈 걸 그랬나. 강차구 너 여기서 땡깡 부리는거 보기 싫으니..."
"어? 나 괜찮아. 다만...26일 아침을 정말 싫어하는 우리 메이르 선수를 위해 급히 만든 약속이니까요!"
"...그 전에는 내가 우울해 보여서 약속 잡은거 아니였어?"
"아니~"
"한 입으로 두 말하는거 봐. 역시 우리 강차구 감독님이라니까."
"히힛."
".....그런걸로 좀 웃지마! 칭찬 아니니까."
메이르가 화를 내면 차구는 아무렇지 않게 차단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르의 앙칼진 반응이 보기싫은것도 잔뜩 화남이 묻어있는 목소리를 듣기 싫은것도 아니라 화남과 당황함은 전혀 보이지도 않은 채. 그저 아스타 백화점 앞을 지나다니는 수 많은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린 소년의 눈에 보이는 신기한 것은 크리스마스는 레고처럼 계획된 것 처럼. 세이렌의 목소리와도 같은 신나고 웅장한 캐롤송을 틈새가 보이는 길거리로부터 시작해 울려퍼지기 시작했고 나무는 물론이고 앙상하게 말라붙은 물건마저 다들 꼬마전구를 칭칭 감고있었다. 백화점 앞에는 예술가가 직접 만든듯한 루돌프의 조각상이 보였고 붉은코는 다른 재질로 만들었는지 더욱 더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저 트리. 차구가 예전부터 보고싶다고 메이르에게 요청하고 억지약속을 잡았던 트리. 거대한 초록색들이 한 눈에 들어와 사람들 모두를 한 번씩 경이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능력을 지녀서 그 여파로 인해 남녀노소다 가리지 않고 그 트리 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 찍은 사람들은 차구와 메이르가 서 있는 그 길거리로 가 같은 곳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심야의 회전목마처럼 급히 또는 천천히 달아나고 뛰어가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차구와 메이르 주위로 돌아가고 떠나고 백화점을 향해 나아가는 그 모습이 정말로 심야의 회전목마 같았다.
"화 다냈어?"
"..."
차구의 두 눈 속에는 트리도 전구도 다 사라지고 이제 메이르 밖에 보이지 않았다.
"강차구."
"?"
"...부탁 하나만 들어줘."
그 말과 동시에 메이르는 차구의 두 팔을 잡았다.
"메이르..."
두 팔을 아프지 않게 부드럽게 잡은 메이르의 두 손,
재질이 좋아보이는 장갑을 착용했는데도 왠지 온기가 느껴지는거 같아 차구는 저절로 자기의 팔을 메이르의 두 손에게 맡겼다. 부탁이라면, 메이르라면 상당히 어려운 걸 말해주지 않을까. 차구는 속으로 킥킥하고 웃기 시작했다.
"...잠시...이러고 있어줘."
그러고는 차구의 두 팔을 세게 잡았다. 동시에, 차구의 작은 몸이 메이르의 코 앞으로 다가와 마치 금방이라도 안겨버릴듯한 모습이 되었다. 고개를 살며시 들면 자신보다 키가 큰 이 하늘색 긴머리 여자아이의 말끔한 얼굴이, 코의 선이 바로 자기 위에 깨끗하게 보여져 있었다. 그리고 드문드문 보이는, 붉은 얼굴. 아니, 붉으면서도 분홍빛을 발광하며 시선은 저 하늘위로.
"물론."
차구는 크게 웃음지었다.
메이르가 추워서 볼이 저런건지 아니면 누구나 생각하는 그 감정을 나에게 주는게 맞는건지.
사실은, 차구만이 알고있을지도...
고정된 두 사람 사이로, 사람들은 지나가고 눈 송이들이 이제서야 땅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빠르게 눈치를 챈 절반의 사람들이 눈을 외치며
목적지를 향해 가고있던 길을 멈춘 채. 하늘 위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고 차구와 메이르는 이제서야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는,
"26일...뭐, 이번은 최악은 아닐지도."
"히히. 당연한거 아니야?"
크리스마스의 눈이 시작되어 복잡한 거리를 거침없이 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얀 눈, 크리스마스의 시작.
오늘은 12월 25일, 누구나 다 아는 크리스마스다. 가족과 함께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며 주변이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그런 날이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날 같은 건 오지 않았다. 어렸을 때만 해도 나와 함께 있어주던 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셨고, 그나마 가족으로 남아있던 할아버지는 엘레멘탈그룹에 힘을 쓰느라 바쁘시다고 나와 같이 있어줄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럼, 집사한테 있어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 하, 내가 양심이 있지. 집사한테도 같이 크리스마스를 즐겨야 할 가족이 있을 텐데 내가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스러워 남아있겠다고 하는 걸 간신히 막아 보낸 집사를 다시 불러오란 말인가? 내가 외롭다는 이기심으로 가족과 즐겁게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을 집사를 불러내기는 싫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즐기기만 해도,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왜 나에겐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는 거지?
“큰 집에 혼자 있으니 이런 생각만 하고… 밖에서 바람 좀 새야겠다.”
모처럼의 크리스마스인데 집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 바람을 새면 조금이나마 지금의 상황을 잊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밖에 나가 입을 옷을 옷장에서 대충 골라 입은 후 수많은 코트 중 어떤 것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잠깐 바람을 새는 것뿐이니 별로 차려입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하여 진남색의 더플코트를 꺼내 걸쳐입었다.
"원래 이렇게 컸던가…."
특별히 챙길 것도 없었기에 옷을 다 갖춰 입은 채 조용히 집 밖으로 나온 나는 집 문을 열기 전에 몸을 틀어 커다란 내 집을 바라보았다. 집 안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어두컴컴한 집이 어째서일까, 쓸쓸해 보인다고 느껴버렸다. 아직 초등학생인데 이런 감정을 느끼면 어쩌자는 거지. 그보다 나, 메이르는 이런 감정을 느낄 사람은 아니라고! 정말 제정신이 아닌 듯한 나의 모습에 서둘러 집에서 빠져나왔다.
* * *
크리스마스와 어울리는 노래가 울려 퍼지는 시내 거리로 나오니 아까의 상태를 생각했을 때, 지금 상태는 한결 나아진 거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라고 화려한 조명과 장식들이 꾸며진 거리에서 행복한 듯 웃음이 끊기지 않는 가족들이 지나가고 건물의 유리 사이로 가족끼리 즐겁게 식사하는 모습이 비치는 것을 보니 씁쓸해져 괜히 나왔나 싶었다.
"메~ 이르!"
"켁!"
그렇게 집에 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다시 집에 가볼까, 하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달려와 코트의 모자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켁, 하는 소리를 내게 되었다. 숨 막혀 죽을 뻔하게 만든 사람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려보니 내 밑으로 낯설지 않은 녀석이 보였다.
“강차구?”
왠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낯설지 않더라니…. 코트와 이어져 있던 모자를 잡아당긴 사람은 다름 아닌 강차구였다. 처음엔 어디선가 나타난 녀석에 어리둥절해 하였지만 날 숨 막히게 하였음에도 싱글벙글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하는 녀석에 나는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넌 웃음이 나오냐?”
내 말에 그는 무슨 말이냐는 듯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뻔뻔도 하셔라. 방금 달려오면서 내 모자 잡아당긴 건 금세 까먹으셨나 보지? 자신이 나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이제야 생각이 났는지 두 손을 마주치며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깨달은 듯한 얼굴을 하는 그에 이제 사과하겠지, 하고 사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사과가 아니었다.
“에이, 그거 가지고 화난 거야? 메이르, 생각보다 좀생이네—.”
저걸 그냥…! 사과 대신 나를 좀생이라며 비좁은 남자로 만든 그에 확, 멱살을 잡아 흔들까 했지만 그러면 괜히 내 힘만 빠지는 것이니 한 번 봐주기로 하며 뒤늦게 그에게 그렇게 뛰어와 나를 잡은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에 그는 아, 왜 잡았더라…? 하고 턱을 괴며 고민을 하는 것이었다. 아까 멱살을 잡았어야 했는데….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의 멱살을 잡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였다.
“메이르, 시간 있어?”
턱을 괴며 고민하던 그는 멱살을 잡지 않은 것에 후회하고 있던 나에게 시간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뜬금없긴 했지만 그건 왜 묻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살짝 움찔하더니 말하는 것을 망설이는 듯하였다. 왜 저러는 거야?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그에 이상하다고 느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나에게 팔짱을 끼곤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나랑 케이크 사러 가자!”
케이크를 사러 가자는 그에 내가 왜 그런 곳에 가야 하느냐며 가는 것을 꺼리는 티를 팍팍 냈지만 역시나 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같이 케이크 고르면 더 맛있을 거라고? 어서 가자! 억지로 나를 끌고서 결국 케이크를 파는 빵 가게로 들어와 버렸다.
“꼬맹아, 대충 고르지?”
케이크 하나 고르는데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보며 뭐가 제일 맛있을까, 하고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케이크 하나 가지고 이게 무슨 짓인지…. 어서 그가 케이크를 고르고 헤어지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서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멍 때리고 있던 것을 그만두고 뭔가, 하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저어… 여자친구분하고 같이 고르시는 건 어떠세요?”
……여자친구? 빵집에서 일하는 여직원이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부르는 듯하더니 그다음으로 하는 말이 여자친구와 같이 고르는 건 어떠냐는 거였다. 아니, 근데 여자친구? 빵집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강차구랑 나, 이렇게 둘뿐인데…… 뭐야. 지금 강차구를 여자로 착각한 거야? 어떻게 보면 여자로 착각하냐… 몸이 좀 여리여리하게 생기고 키도 좀 작은 데다가 남자라기엔 귀여운 인상이긴 하지만…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건데? 나, 메이르가 저 녀석의 애인으로 보였다는 거에 이상하다는 생각부터 하는 게 맞지 않나? 나는 단단히 오해한 여직원에게 난 강차구의 애인도 아닐뿐더러 저 녀석은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케이크를 먹을까 고민하던 그가 갑자기 튀어나와선 내 팔짱을 잡더니 케이크가 나열되어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메이르, 메이르, 난 이 딸기가 많이 장식되어있는 케이크가 마음에 드는데 넌 어때?”
내가 먹을 것도 아닌데 자신이 마음에 드는 케이크를 보여주며 나는 어떠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떨떠름하게 괜찮네, 하고 대답해주었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그는 뒤에 있던 여직원에게 이걸로 하나 포장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의 부탁에 여직원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흐뭇해 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고른 케이크를 꺼내어 잘 들고 갈 수 있게 포장해주었다. 포장해주는 동안 가게 안을 둘러보는데 어느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할아버지 방에서도 볼 수 있었던 병이었는데 할아버지는 내가 아직 먹을 나이는 아니라며 나중에 크면 같이 먹자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내가 먹을 나이가 아니라는 것과 생김새를 생각해보면 와인이라는 술이겠지.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아, 그것도 같이 계산하시겠어요?”
어느새 포장이 끝난 여직원이 진열되어있던 와인병을 보고 있던 나에게 그것도 같이 계산하시겠냐는 질문을 건네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상당히 놀랐지만 애써 놀람을 감추고 필요 없다며 그에게 계산이 끝났으면 얼른 가자고 하였지만, 그는 어느새 내 옆으로 달려와 내가 보고 있던 와인병을 가리키며 메이르, 이거 마시고 싶은 거야? 하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누가 먹고 싶다고 했냐며 소리를 쳤지만 내 말은 아예 무시한 채 그럼, 사자! 하고 자신의 키보다 위에 있던 와인병을 꺼내 드려 했지만 작은 키로 인해 꺼내기는 힘겨워 보였다. 까치발을 들은 채로 끙끙거리며 꺼내려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워 어쩔 수 없이 손이 닿는 내가 대신 와인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됐냐?”
“응! 메이르, 고마워!”
하도 힘겨워하길래 안쓰러운 마음에 도와준 건데 그걸로 고맙다며 와인병을 받는 그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간질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의아해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은 생각에 빠지려는 찰라, 나에게서 받은 와인병을 가지고 계산대로 달려가 계산을 해달라는 그에 나는 재빨리 생각하던 것에서 빠져나와 계산대로 달려가 와인병을 뺏어 들었다. 와인병을 뺏은 나의 모습에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한 그에게 나는 와인병에 대해 주의를 주며 알려주자 그는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나에게서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었다.
“메이르.. 너, 술에 입대서 너도 모르게 볼 정도로 좋아진 거야…?”
“……야, 오랜만에 멱살 잡히고 싶냐?”
나를 무슨 어린 나이에 술맛을 알게 돼서 먹으면 안 되지만 먹고 싶은 유혹을 참을 수 없어 나도 모르게 와인병을 빤히 바라보고 싶은 사람으로 만든 녀석에 금방이라도 끌어 나올 거 같은 화를 억누르며 약간의 협박을 주자 그제야 그는 일그러졌던 얼굴을 풀곤 응? 그런 거 아니었어? 하고 멀뚱멀뚱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아니지! 그리고 이 나이에 어떻게 술을 마시냐? 이건 제자리에 갖다놓고. 손에 쥐고 있던 와인병을 들고 원래 있던 제자리에 두기 위해 몸을 틀자 그는 아쉽다는 듯한 소리를 하면서 툴툴거렸다. 자기가 먹고 싶었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며 와인병을 제자리에 놓자 뒤에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술 아닌데요…."
술이 아니라는 여직원의 말에 나는 제자리에 올려놓은 와인병에서 손을 떼 그게 무슨 말이냐며 여직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직원은 생김새만 샴페인 병이지, 안에 들어있는 건 어린이도 마실 수 있는 복숭아 맛의 톡 쏘는 탄산음료와 비슷한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여직원의 설명에 나는 그에게서 이상한 오해를 사며 입이 닳도록 설명하고 화낸 것이 너무나 허무했다.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그는 눈을 반짝이며 저거 살래요! 얼마예요? 하고 여직원에게 가격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보다, 케이크만 사려는 거 아니었어?
“야, 너 케이크만 사려는 거 아니였냐?”
“아. 맞다….”
그는 아쉬운 듯 시무룩한 얼굴을 하며 주머니에서 겨우 케이크 하나 살만한 돈을 꺼내보더니 꺼낸 돈을 여직원에게 건네 미리 포장해놓은 케이크를 받곤 나를 스쳐 지나가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답지 않게 어두운 분위기를 내며 나가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이러는 것인지 이유를 모르니 영 답답하여 화나 있을 무렵,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나가던 그가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느낀 샴페인 병이 생각났다. 다행히 잠깐만 바람 샌다고 나왔지만, 혹시 몰라 지갑을 챙겨 들고 온지라 서둘러 자리에 올려놓았던 샴페인 병을 챙겨 들고 여직원에게서 계산한 뒤 가게를 나섰다. 그 뒤로 여자친구분을 잘 위로해달라는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걸로 치고 서둘러 그의 모습이 얼핏 보인 곳으로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
"야! 강차구!"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아 당기자 그는 내가 당김으로 인해 몸이 틀어지면서 매우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앞의 일은 생각도 않고 뛰쳐나와서인지 막상 그를 잡고 나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람을 붙잡았으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니냐는 불평을 듣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메이르, 손, 손 좀…."
불평이 올 줄 알았는데 불평이 아닌 아픈 듯 인상을 찡그리며 나에게서 손을 빼려는 그가 보였다. 잠깐, 아파…? 아파하는 그의 모습에 놀라 서둘러 붙잡고 있던 그의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그에게서 손을 떼자 얼마나 세게 부여잡고 있었던 것인지 그의 손목이 벌겋게 되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아야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벌겋게 된 손목을 어루만졌다. 그런 모습을 보니 미안해져 조심스럽게 괜찮으냐고 물어보자 그는 단호하게 괜찮지 않다고 대답했다. 단호하게 대답한 그에 나는 처음엔 당황하다가 내가 어떡하면 되겠느냐고, 내가 뭘 하면 손목을 빨갛게 만든 것에 대해 괜찮아해 줄 수 있느냐는 뜻으로 물어보자 그는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같이 크리스마스 파티하자!"
"하?"
같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자는 그에 나는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자 그는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마주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메이르도 하나뿐인 가족, 죽은 줄로만 알았던 할아버지가 돌아오셨으니까. 함께 크리스마스를 즐겨야 한다는 거 알고 있어…. 그래도, 잠깐만이라도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가족과 즐기면 될 크리스마스를, 왜 굳이 나랑 같이 있어달라고 하는 것인지. 그는 내가 할아버지와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줄로 알고 있지만, 같이 보내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는 게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엘레멘탈그룹의 일로 바쁘시다고 말하였지만, 그 일 말고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할아버지가 돌아온 사실이 떠들썩해져 기자회견을 하러 가신 것도 있기에 오늘 밤에는 분명히 들어오지 못할 테니까, 그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는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잠깐 바람을 새러 밖으로 나온 것이었는데 우연히 그를 만나 그에게 잠깐만이라도 같이 있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혼자 있는 것보다는 잠깐이라도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이 낫겠다 싶어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알겠다며 그의 부탁을 승낙해주었다.
“정말? 정말이지? 무르기 없기다!”
그는 내가 가준다고 한 것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조금 전에 우울해 하면서 조마조마했던 사람은 사라지고 방방 날뛰며 내가 다시 싫다고 할까 봐 걱정돼서인지 두 번씩이나 다시 물어보면서 무르기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렇게나 좋아해 하는 그의 모습을 처음 봐서인지 처음엔 얼떨떨해 하였지만 나 하나 가는 것에 왜 이리 호들갑인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붙잡혀 어서 우리 집에 가자고 걸음을 재촉하는 그에 의아해 하던 생각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그의 뒤를 따라 그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메이르, 안 들어오고 뭐 해?”
그의 집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는 것인지 캄캄한 집만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현관 앞에 서서 문을 열더니 현관의 불을 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집 안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그가 현관 앞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어 안 들어오고 뭐하냐며 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하자 나는 할 수 없이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희 집사… 아, 아니, 아줌마는 어디 가신 거냐? 아저씨도 안 보이시고….”
그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저번에 어쩌다 집에서 재워달라고 부탁을 하러 왔을 때 흔쾌히 수락해주신 그의 엄마와 그의 집에서 자게 되어 그의 옷을 입으려 했으나 나에게 너무 작아 자신의 옷을 빌려주신 마구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두 사람이 어디 가신 거느냐고 물어보았는데 그는 내 질문을 듣고선 얼굴이 굳어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웃어 보이며 나를 식탁으로 안내하였다. 질문에 답하지 않은 그에 그의 안내를 받아 식탁에 앉으면 대답해주겠거니 싶어 그의 안내를 받아 식탁 의자에 앉아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병을 식탁 위에 올려두어 그가 내 질문에 대답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나와 마주 앉아선 사온 케이크를 식탁 위에 올려두곤 포장된 상자 안에서 케이크를 꺼내 보였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사온 케이크만 멍하니 바라보는 그에 나는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너희 부모님 어디 가셨냐?”
“……”
다시 한 번 물어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나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답답하여 빨리 대답 좀 하라고 재촉하려 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그의 얼굴은 마치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고 나가던, 그때의 모습과 매우 비슷했기 때문에—…. 물으면 안 될 것을 물어본 거 같은 기분이 들어 그에게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말라고 입을 때려던 순간이었다.
“아빠는 기자회견 때문에 바쁘셔서 안 계신 거고, 엄마는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 늦으신다고 집에 안 계신 거야.”
쓸쓸함이 묻어나 있는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나와 같은 이유로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 그 사실이 놀라서, 그래서 그가 잠깐이라도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흠…, 오늘따라 분위기가 평소랑 다르게 어두웠던 이유가 그런 거였구만? 이거 참…, 뭐. 내가 딱히 같이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도 할아버지랑 같이 있을 시간이 없기도 하고 저 녀석이 혼자 있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같이 있는 걸 좋아할 거 같으니까 어쩔 수 없이 같이 있어주겠다는 거야.
"그럼, 그동안 내가 사온 샴페인 병에 든 음료수랑 같이해서 케이크나 먹자."
"메이르…?"
"뭐야, 그 의외라는 눈빛은."
샴페인 병을 내밀며 같이 케이크를 먹자고 말하자 그는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니 기분 나빠져 그에게 따지는 듯 말하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졌더니 어서 먹자며 케이크를 잘라 올려놓을 그릇과 음료를 따를 잔을 가져와 식탁에 두었다. 그러곤 그는 직접 케이크를 플라스틱 칼로 잘라 그릇에 올려두고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단 거는 질색이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먹어볼까?
"…어, 음…, 저기, 메이르. 이거 어떻게 여는 거야?"
역시 어린이 입맛인 그가 고른 것이라 그런지 달달함이 입에 맴도는 케이크를 먹고 있던 도중 내가 사온 샴페인 병에 들어있는 음료를 따라 마시려고 했는지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뚜껑을 열려고 했지만, 서민인 그가 샴페인을 만져봤을 리도 없고 여는 방법도 원래 즐겨 먹던 것과는 다를 테니 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이리 줘봐, 하고 그가 잡고 있던 샴페인 병을 가져가 나무의 딱딱한 뚜껑을 잡아 뽕, 하는 소리와 함께 열었다. 그러자 그는 우와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반짝였고 나는 이런 것에 뭘 감탄사까지 내뱉느냐며 그의 컵에 음료를 따라주었다. 그는 나에게 음료를 받으면서 감탄사를 내뱉을만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단해 보였는걸? 그리고…, 정말 도련님이라는 걸 깨닫게 됐고 말이야."
그러면서 싱긋 웃어 보이는 그를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마지막에 했던 말을 곱씹어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도련님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는 건… 지금까지 내가 도련님이었다는 걸 잊을 정도로 도련님처럼 보였지 않았다는 소리잖아? 물론, 내가 말하긴 그렇지만 전에는 싸가지도 없었고 도련님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게 할 행동도 보이지 않았… 아니, 이렇게 되면 내가 나를 비하하게 되는 거잖아!!
"메이르?"
"뭐야!"
그의 말 때문에 이상한 생각을 하다가 결국엔 나를 비하하게 된 생각에 이르게 되자 짜증 났던 나는 그냥 부른 것뿐인 그에게 억양을 높여 소리치자 그는 뭐 때문에 화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얼른 안 먹으면 케이크 내가 다 먹어버린다며 포크로 케이크를 집어 먹으며 내가 사온 음료를 맛있게 마시는 것이었다. 하, 그래. 너나 실컷 먹어라. 난 단 거 별로니까. 그에게 그런 말을 남기곤 몸을 틀어 다리를 꼰 채로 깨작깨작, 그릇에 놓인 케이크를 먹자 그는 정말? 그럼 내가 다 먹어버린다! 하고 소리치며 그가 케이크를 마구 먹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도 너무 많이 먹어 숨이 막혔을 때는 가슴을 두드리며 잔에 들어가 있던 음료를 꿀꺽꿀꺽 마셔 입안에 가득 들어있던 케이크를 겨우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곤 휴, 살았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의 모습을 힐끔 보곤 어린애 같긴, 하는 생각을 하며 잔에 있던 음료를 홀짝, 마셨다.
"지금이 몇 신데… 너희 부모님은 언제 오시는 거냐?"
사온 케이크와 음료를 다 마시고 소화할 겸, 그의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잠깐 그의 방에 들어와 그와 같이 게임을 하면서 대화를 하던 중 늦은 시각이 되었는데도 아직 들어오시지 않은 그의 부모님에 그에게 언제 오시는 거냐고 물어보자 그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벌써 9시도 넘었는데… 아저씨랑 아줌마는 언제 오시는 거야?
"메이르도 가야겠지? 할아버지도 기다리고 계실 텐데 너무 오래 붙잡아 버렸네…."
내가 시계를 바라보고 있자 이제 내가 집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제 내가 가봐야겠다고 집에서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실 텐데 오래 잡아버렸다고 미안해하며 나를 데려다 주려고 하는 것인지 방문을 열어 보였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에서 홱, 하고 몸을 돌려 침대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나의 모습에 그는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메이르, 안 가…?"
"괜찮아. 나도 집에 가봤자 아무도 없어서 혼자 있을 테니까."
"에?"
털썩, 침대에 드러눕곤 천장을 바라보며 얘기해주었다. 나도 너처럼 할아버지가 기자회견도 있으시고 엘레멘탈그룹의 일로 바쁘셔서 집에 아무도 안 계셔. 그래서 집에 혼자 있기 그러니까 잠깐 바람 좀 셀 겸, 밖으로 나왔는데 너를 만날 줄은 몰랐다. 뭐, 덕분에 너랑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 건 좋았지만 말이야.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키면서 그와 만날 줄은 몰랐다는 얘기를 하자 그는 불쑥 얼굴을 내밀더니 그게 정말이야? 하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의 얼굴에 놀라 몸이 굳어졌지만 이내 정신을 차려 일단 얼굴부터 치워보라며 신경질을 내자 그는 아차, 하며 서둘러 얼굴을 치우더니 내 옆에 앉아 정말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래.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이냐?"
내 말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니, 메이르는 그런 거에 거짓말할 리가 없지! 하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해 하더니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습을 본 것인지 그는 깜짝 놀란 듯한 얼굴을 하다가 헤헤, 메이르도 좀 웃어봐. 그렇게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하고 살짝 몸을 숙여 내 볼에 검지를 올려두더니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생각보다 아프면서 짜증이 나 얼른 손 치우라고 말하자 그는 치우려는 듯하다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볼에 검지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아오, 이게… 꼬맹이라고 봐줬더니!
"야!"
버럭 화를 내며 내 볼을 꾹꾹 눌러대던 그의 손을 덥석 잡아 그를 침대로 밀어붙여 눕히게 하였다. 내 행동에 매우 놀랐는지 어느 때보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나는 그대로 몇 초간 가만히 있다가 밑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얼핏 들리자 나는 서둘러 그에게서 떨어져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코트를 걸쳐 입었다.
"메, 메이르, 가려고?"
"…어. 너희 부모님 오신 듯하고 집에 할아버지 오셨을지도 모르니까 가봐야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금 가도 아무도 없을 거라는 말을 했지만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이 장소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그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주면서 갈 준비를 마친 나는 그의 방문을 열어 그냥 나가려다가 그러는 것은 왠지 아닌 것 같아 그의 얼굴을 힐끔, 보면서 한 마디를 해주곤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잇달아 그도 나에게 같은 말을 해주며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들어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민우는 쇼윈도 속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초록색 트리와 빨간 선물상자로 가득한 선물가게는 따뜻한 조명을 받아 반짝였지만 민우는 추운 바깥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글자를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바짝 다가가는 바람에 입김은 자국이 되어 남았다. 민우는 놀라서 몇 걸음 물러났다. 얇게 쌓인 눈이 발자국 모양대로 흩어졌다. 올해 첫눈이었다. 처음에는 진눈깨비에 가까웠던 것이 생각보다 많이 내려서 길가에 추적추적 쌓였다. 민우는 운동화를 털어내며 장갑 낀 손으로 뺨을 만졌다. 새삼 춥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에서 소리가 났다. 일 때문에 늦는다는 엄마의 문자였다. 민우는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다시 쇼윈도 앞에 섰다. 카운트 카드가 잘못됐는지 안쪽에서 점원이 허둥지둥 나타나 숫자를 넘겼다. D-7. 민우는 소리 내어 카드를 읽었다. 크리스마스까지 이제 일주일, 고작 일주일 남았다. 민우는 습관처럼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짚어보았다. 내일은 훈련, 모레는 드래곤윙즈와 연습경기, 그리고 또……. 하나씩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문득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엄마의 번호를 누르고 문자를 조금 두드리다가 그만두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같이 보낼 수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웠다. 민우는 돌아봤다가 기겁을 하고 물러났다.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도로 한가운데에서 헐떡이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앞발을 붙잡아 일으키면 웬만한 어른 키는 될 것 같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진입하려던 차들이 하나둘 멈춰서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민우는 무서워하면서도 주의 깊게 개를 살폈다. 처음에는 파리나 모기를 쫓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빠르게 회전하며 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는 목줄 끝을 잡으려고 애쓰는 듯 했다. 꼬리 쪽으로 고개를 쭉 뺀 채 제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모습에 민우는 웃음이 터졌다. 멍청하고 귀여운 개였다. 외형적으로는 털이 길고 노랗고 예뻤다. 잘 관리 받아 깨끗한 걸 보면 분명히 주인이 있는 개일 텐데. 민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사이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당장 개를 발로 차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에 민우는 자기도 모르게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방금 전까지의 공포와 머뭇거림은 어디로 가고 민우는 냅다 목줄을 잡아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버둥거릴 줄 알았는데 개는 생각보다 순하게 끌려 왔다. 아니 그러다 못해 금세 신이 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민우는 어떻게 할 틈도 없이 개에게 끌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마구 때리고 다리에서 힘이 쭉쭉 빠졌다. 민우가 가쁜 숨을 주체하지 못하고 콜록거렸다. 난데없는 개썰매는 다행히 맞은편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오는 다보를 만나고 멈췄다.
“야! 이 똥개가! 어디 갔었어! 놀랐잖아!”
다보가 화를 내고 소리 지르는 동안 민우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어져 있었다. 거친 숨을 고르느라 인사도 못 하고 있는 민우를 다보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보았다. 어, 송민우? 다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민우는 아직도 빠르게 뛰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다보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다보가 고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민우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웬 개야? 너희 집 개 안 키우잖아.”
“아르바이트.”
다보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초등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 중 개 산책시키기만큼 짭짤한 것이 없었다. 겨울이면 사람들은 추워서 나가기 싫다고 난리인데 개들은 산책 가자고 난리잖아. 시급을 말해주며 다보가 씩 웃었다. 이걸로 우리 가족 크리스마스 선물 살 거야. 천천히 옆을 따라 걷던 민우가 다보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다보는 진심으로 즐거워보였다. 민우는 돌핀 시절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모두 모여 카드를 주고받고 호파 감독이 사 온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다보는 가족끼리 외식하기로 했다며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고 민우는 자리가 파할 때까지 있다가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거실의 트리는 화려했고 미리 챙겨놓은 선물도 있었지만 그 날 엄마는 출장지에 가느라 같이 있지 못했다. 전화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났다. 민우는 시무룩하게 회상을 마쳤다. 개가 다 안다는 것처럼 다리에 뺨을 비벼왔다. 위로해주는 거야? 순한 눈망울을 내려다보며 민우가 작게 웃었다.
“개 이름이 뭐야?”
“몰라.”
민우가 걸음을 멈추고 다보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보가 정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몰라. 이웃 아주머니한테 급하게 소개받았단 말이야.”
“그래서 똥개라고 한 거야?”
“응.”
“……자꾸 그렇게 부르니까 도망간 거 아니야?”
다보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민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개의 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둘은 한적한 길을 따라 걸었다. 바쁜 훈련과 메이르 뒷담, 간간이 들리는 호파 감독의 근황 등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민우는 개를 쓰다듬고 있었다. 다보는 신경 쓰지 않는 척 했지만 결국 한 소리 늘어놓고 말았다. 그러지 마, 정 들어. 사람 손을 많이 그리워하는 개였다. 축 쳐진 귀와 덩그러니 앉아 있는 모습이 꽤 외로워보였다. 그것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다정하게 턱을 긁어주고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내려다보다가 다보는 고개를 돌렸다. 서로 가는 길이 다른 사거리 앞이었다.
예상대로 개는 끙끙대며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곤란해 하는 민우 주변을 왔다 갔다 하더니 다보가 목줄을 당기는 손에 힘을 주자 앓는 소리를 내며 조금씩 멀어졌다. 민우는 손을 흔들고 돌아섰지만 잠시 후 그 자리로 되돌아왔다. 개와 다보는 벌써 가고 없는데 혼자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민우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 위에 점점이 찍힌 개의 발자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귀엽고 쓸쓸하다는 생각이 멈출 때까지.
*
다음 날 다보는 어제보다 이른 시간에 민우와 마주쳤다. 우연이었고 근처에 선물가게가 많은 것을 보면 민우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민우의 뺨이 유난히 빨갛게 얼어붙은 것이 신경 쓰였다. 바깥에 오래 있었냐는 말에 민우는 괜찮다고만 했다. 그건 별로 괜찮은 대답은 아니었다. 다보가 추궁하는 동안 새로 맡은 강아지들이 산만하게 돌아다녔다. 다보는 허둥거렸고 또 목줄을 놓치고 말았다. 순식간에 강아지 세 마리가 왈왈거리며 각자 다른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산책이고 뭐고 둘이서 진땀을 흘리며 붙드는 데에만 많은 시간이 걸렸다. 민우는 어제의 그 개가 아닌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하얗고 자그마한 강아지에 마음을 빼앗겼다. 목줄을 단단히 확인한 다보가 지쳤다며 공원 잔디에 드러누웠다. 겨울 하늘이 파랗다 못해 추웠다. 다보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강아지 좋아하나봐.”
“응. 좋아해.”
“키운 적은 없어?”
“엄마가 싫어하셔서.”
다보는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떼를 써 보지 그랬냐는 말은 민우와 어울리지 않았다. 다보가 알기로 민우네 부모님은 항상 바빴다. 혹은 민우가 축구하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경기를 할 때면 늘 선수들의 부모님이 응원 겸 구경을 하러 오곤 했다. 아이가 주전이든 후보든, 경기가 실제든 연습이든 상관없었다. 다보네 부모님도 동생과 함께 한두 번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없었다. 민우라면 왜 오지 않았냐고 칭얼거린 적도 없을 것이다. 민우는 그런 아이였다. 호파 감독은 다보와 민우에게 종종 어른스럽다고 칭찬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고, 다보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 날 공원 구석구석 소소하게 꾸민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경하며 두 사람과 세 마리는 느긋하게 산책을 마쳤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 날 다보는 민우와 또 다시 마주쳤다. 민우는 우연이라고 했지만 다보는 믿지 않았다. 어제처럼 추궁하는 대신 다보는 민우에게 산책 시간과 코스를 알려주었다. 너무 오래 바깥에 있어서 빨개진 코를 만지작거리던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따뜻한 캔커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길을 걸었다. 좋아하는 축구 선수 이야기를 하는 민우는 즐거워보였다. 다보는 민우를 곁눈질하며 언젠가 쏘니가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맨날 늦게까지 남는 걸 보면 민우는 정말 축구를 좋아하나봐. 다보는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동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보가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동생은 쫄래쫄래 다보 뒤만 따라다녔다. 일은 서툴지 아무 도움도 안 되지 신경은 쓰이지, 다보가 짜증을 내자 동생은 울음을 터뜨렸다. 집에 혼자 있기 싫단 말이야. 호파 감독의 조수를 자원하던 민우가 그 날의 동생과 다를 것이 없어보였지만 다보는 말을 아꼈다.
생각하는 사이 갈림길에 다다랐다. 다보는 평소와 달리 머뭇거렸다. 쪼그려 앉아서 개를 쓰다듬던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다보가 불쑥 말했다.
“밥 먹고 갈래?”
민우가 벌떡 일어섰다. 그래도 돼? 다보가 딴청을 피우며 걸음을 옮겼다. 카레밖에 없어. 민우가 소리 내서 웃었다. 나 카레 좋아해. 유난히 빠르게 걷는 다보의 뒤를 민우는 부지런히 따라갔다. 개를 주인에게 데려다주고 다보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둘은 공터에서 놀고 있는 다보의 동생과 만났다. 셋이서 같이 먹는 카레는 아주 맛있었다. 축구도, 게임도 너무나 재미있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이따금 들리고 작은 트리 앞을 지나갈 때마다 방울 소리가 났다. 다보는 설거지를 하면서 갑자기 조용해진 안방을 내다보았다. 동생은 곯아떨어진 지 오래였고 민우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불을 가져다주자 민우가 눈을 끔뻑거렸다. 마침 텔레비전에서 크리스마스 특집 영화 소개가 지나갔다. 나홀로집에 시리즈도 있었다. 그때 옆에서 민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아지가 있으면 좋겠다.”
“…….”
“저 애도 강아지가 있었으면 외롭다고 느끼지 않았을 거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민우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다보는 이불을 마저 덮어주고 혼자 영화를 보았다. 동생과 같이 볼 때는 그저 재밌는 영화라는 생각만 했다. 2인조 도둑이 당하는 장면들은 우스꽝스러웠고 주인공이 마음껏 카드를 긁는 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민우의 말을 듣고 보니 주인공이 가족을 돌려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개가 있다면 어땠을까. 다보는 생각해보았지만 다를 것은 없어보였다. 그래도 주인공은 가족을 돌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문득 다보는 창문을 덮는 색을 의식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보는 민우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배웅하는 길에 민우가 하품 가득한 얼굴로 카레가 아주 맛있었다고 말했다. 모른 척 영화 이야기를 꺼냈지만 민우는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보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산책 아르바이트는 이브가 마지막이었다. 전날 타이거킹즈 팀원들끼리 모여 핫도그 파티를 했던 것을 되새기며 민우는 다보를 기다렸다. 멀리서 다보의 빨갛고 노란 머리카락이 보이자 민우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개가 보이지 않았다. 뒤에 따라오고 있는 줄 알았지만 없었다. 민우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다보를 바라보았다. 다보는 설명하지 않고 앞장서서 걸었다. 발이 멈춘 곳은 선물가게 앞이었다.
“아르바이트는 원래 어제가 끝이야.”
“뭐? 그런데 왜 말 안 했…….”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
다보가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민우는 다보를 따라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다보가 안쪽에서 무엇인가 뒤적이더니 바로 계산대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입구에 어색하게 서 있던 민우는 문득 다보가 서 있었던 곳이 인형 코너였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순간 털 뭉텅이가 민우의 얼굴을 덮쳤다.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 민우의 팔을 다보가 안전하게 붙잡았다. 민우는 품 안에 떨어지는 강아지 인형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다보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크리스마스 선물.”
민우는 당황했다. 매 해 카드는 주고받았지만 서로 생일을 제외하면 선물은 딱히 챙긴 적이 없었다. 미안, 난 준비한 게, 없는데. 민우가 더듬거리자 다보가 상관없다며 말을 이었다.
“아르바이트 같이 했잖아. 시급 안 받은 값이라고 해 둬.”
민우의 입이 벌어졌다. 할 말은 많았다. 아르바이트는 원래 다보가 하던 것이고 민우는 긴 산책시간 중 일부만 어울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보는 돌려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턱을 들고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였다. 민우는 사양하는 대신 쑥스럽게 웃었다. 고맙다고 말하는 소리가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묻혔지만 다보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때 민우의 주머니에서 캐롤 소리가 났다. 민우는 인형을 끌어안고 전화를 받았다. 아, 엄마. 다보가 민우를 힐끔 보고 출구 가까이 섰다. 잠깐 나왔어요. 친구랑 있어요. 네. …정말? 정말요? 민우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잠시 후 민우가 다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민우는 웃고 있었다.
“엄마 선물을 아직 못 샀어. 같이 골라줄래?”
문을 밀어젖히던 손이 내려갔다. 다보는 민우와 함께 장갑과 목도리가 있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리본이 달린 장갑과 무늬가 예쁜 목도리를 끈질기게 비교한 끝에 민우는 선물을 골랐다. 부모님께 드릴 선물은 이미 고른 다보는 장난감 코너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민우는 저번에 다보의 동생이 지나가듯이 언급한 로봇 이름을 기억해내고 점원에게 찾아달라고 말했다. 마침내 각자 선물상자를 품에 안은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민우의 코트와 다보의 점퍼 모두 모자가 달려 있었지만 둘 다 쓰지 않았다. 기분 좋게 눈을 맞던 다보가 민우를 돌아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 민우는 강아지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응,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
새파란 겨울 하늘 아래,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크리스마스를 전 세계의 기념일로 만든 그 신이라는 양반이 태어난 건 12월 25일인데 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날에 더 들떠버리는 걸까.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찬 24일의 거리를 보며 다보는 혼자 중얼거렸다. 저마다 연인이나 가족을 옆에 끼고 선물을 한 아름 들고 걷고 있는 사랑으로 넘치는 거리.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다보만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뭐, 이제 일도 다 끝났지만.’
몇 시간 전, 산처럼 잔뜩 쌓아 올려진 케이크를 전부 팔기 전까지는 가게를 닫지 않겠다는 사장님 때문에, 추위에 꽁꽁 언 손을 겨드랑이에 넣고 잠시 녹이며 일을 해나가던 도중. 사람이 너무 추우면 화가 난다는 걸 깨닫고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케이크 팝니다~~!!!!”를 외친 탓일까, 예상보다 빨리 케이크가 매진되어버린 것이다.
“수고했어, 고생했지?”
“아, 사장님.”
찌르릉, 하는 문소리와 함께 사장이 나왔다. 손에는 오늘의 봉급과 작은 상자가 들려있었다.
“추운 날에 열심히 해줘서 주는 선물이야. 크리스마스니까 가족이랑 같이 먹으라고.”
“가, 감사합니다!!!”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봉투와 상자를 받았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빨간 상자. 옆면에 붙어있는 투명한 비닐을 들여다보니 케이크 위에, 작은 산타가 보였다.
“덕분에 다 팔려서 가게 문도 일찍 닫게 되었으니 얼른 들어가.”
“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코트 안쪽 주머니에 반으로 접은 돈 봉투를 꼭꼭 숨겨 넣고, 품 안에는 케이크 상자를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으나가며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아직 크리스마스는 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산타가 주인공이고 실제로 존재하는가 안하는가는 어린이들의 중대사항이지만, 다보는 어릴 때부터 산타를 믿지 않았다. 믿어 본 적이 없었다가 바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는걸.
다보에게 크리스마스는 1년 중 가장 거북한 날이었다. 저마다 무슨 선물을 받았는지 자랑하는 걸 듣다 보면 뱃속이 꾸르륵 거리면서 괴로워진다. 아마 내일 모레도 타이거 킹즈 친구들이 산타랑 선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 대겠지.
‘아, 그러고 보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다 보니 잊고 있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작년 겨울, 흰색 유니폼을 입고 축구를 하던 시절, 돌핀 위너스의 호파 감독님과 함께 축구를 하던 시절. 그때에도 크리스마스는 왔었다.
“선물 뭐 받았어?”
“변신합체로봇!!”
“와, 그거 TV에 나오는 거잖아!! 쩐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모두가 자신이 받은 선물을 자랑하며 얼마나 멋진 크리스마스를 보냈는지 떠들어대는 동안, 다보는 비틀리는 뱃속을 꾸욱 누르며 연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신경 안 쓰려고 했지만, 큰소리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어쩐지 부글부글해져서, 야! 그만 떠들고 연습이나 해!! 하고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벤치 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자, 집합. 오늘은 내가 약속이 있어서 연습을 일찍 끝내겠다.”
호파의 말에 아이들이 와~! 하는 함성과 우르르 부실로 들어갔다. 다보는 조금 허탈해진 마음으로 부실로 걸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운동으로 땀을 흘리고 싶었는데 오히려 속만 뒤집어지고 끝나버렸으니. 그보다 평소 연습이 끝나는 시간에 일을 잡아놨는데 빈 시간이 생겨버렸으니 그동안 뭘 해야 할지. 집에 들렀다가 가기에도 어정쩡한 시간이라 근처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데, 겨울이라 밖을 돌아다니기도 춥고 아무 가게 안이라도 들어가 바람을 피하려면 돈이 있거나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한다. ……부실에라도 있을까.
최대한 늦게 나가려고 꿈지럭 꿈지럭대며 옷을 갈아입는 동안ㅡ민우나 다른 애들에게는 먼저 가라고 해두었다ㅡ부실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다 싸둔 가방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털썩 앉아서 피로에 지친 아저씨 소리를 내며 뻐근한 어깨를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다보는 집에 안 가니?”
“아, 가야…죠”
문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호파를 보고 다보는 얼른 일어나려 했지만 호파가 부실 안으로 터벅터벅 들어와 다보 옆에 앉았기 때문에 다보도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쩐지 감독님이 자기한테 할 말이 있는 것만 같았다.
“…….”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계속 옴싹달싹하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평소에도 웃음기 없는 진지한 표정이던 얼굴이 더욱 딱딱해졌다. 말을 하려 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그 태도를 보니, 다보는 감독님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보기 불쌍할 정도로 말을 고르고 고르며 고민하는 모습이었기에 다보는 작게 한숨을 쉬고서는 먼저 선수를 쳤다.
“아르바이트, 오늘도 하러 가요.”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 당일치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 마주친 적이 있다. 손님으로 온 건 아니었고 길을 지나가는 모습을 우연히 본 것뿐이지만, 아마 감독님도 일하고 있던 자신을 본 거겠지. 스스로는 이미 익숙해진 일이지만, 어린애가 일하고 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상한 일이다.
“……그래.”
혹시라도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신경을 써주는 건지 감독님은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일어서려는 겨를도 없어 보였기에 계속 그렇게 말없이 있다가, 다시 말을 꺼낸 건 호파 쪽이었다.
“선물은… 받았니?”
“…….”
다보가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하는 모습이 뚱했었는지, 호파는 자신이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고 생각하며 또 다시 입을 움찔거렸다.
“안 받았어요.”
그런 호파를 신경써주는 건지 다보는 최대한 덤덤한 말투로 툭, 내뱉었다.
“부모님은 바쁘시고…, 돈도 없고, 애초에 산타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집안에 트리가 장식되었던 적 따위, 머리맡에 양말을 걸어놓은 적 따위, 산타를 두 눈으로 직접 보겠다고 밤을 새운 적 따위, 단 한 번도 없다. 고작 해봐야 초코파이 쌓아올리고 초를 꽂아 크리스마스 케이크 분위기를 내는 게 다다. 동생이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에 한번 해봤는데 더 비참한 기분만 들 뿐이라 다시는 하지 않았다.
“……그래.”
쓸쓸한 목소리였다.
“내년에는 꼭 산타가 오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하던 감독님의 얼굴은 고개를 숙이고 계셔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작년의 내년인 올해가 찾아왔다.
‘산타는 없어요, 감독님.’
올해도 부모님은 바쁘고 가계는 어려워 선물 같은 건 없다. 타이거 킹즈가 우승해 상금을 받긴 했지만, 그건 팀의 돈이지 다보 개인의 돈이 아니다. 뭐, 부비에 쓸테니 유니폼이나 축구화 때문에 급전이 필요하게 되는 일은 더 이상은 없겠지만, 하루 이틀 일해서 벌 수 있는 정도의 돈으로 집안 살림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축구는 취미일 뿐.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돈이 나가는 취미이다. 하지만 드는 비용은 스스로 벌어 내겠다고, 부모님에게 폐는 끼치지 않겠다며 유니폼 비도 부비도 스스로 벌어서 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이 돈을 주지 않으면 밥도 못 사 먹는 동생과 가계를 보면 축구를 그만두고 일에만 매진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축구가 좋아서, 하지만 돈이 없어서. 이상과 현실의 대비. 그걸 직시할 때마다 괴로웠다.
‘아, 큰일 났다.’
눈가가 시큼해져 얼굴을 찌푸렸다. 한 번 안 좋은 생각을 하게 되면 계속 안 좋은 생각만 하게 된다. 그래서 운동이니 일이니 스케쥴을 바쁘게 잡고 있는데, 이렇게 일이 일찍 끝나 한가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여러 잡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가난까지 생각하게 됐다. 갑자기 서러워지는 감정을 꾹꾹 참아내려고 다보는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갑자기 부는 찬바람에 결국 서러움이 폭발하고 말았다.
‘왜 나만…….’
서러웠다. 가난한 집안도, 이 추위도, 다른 애들 다 놀 때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뭘 새로 맞출 때마다 돈 걱정을 해야 한다는 것도, 크리스마스에 선물 하나 받지 못한다는 것도, 그래서 친구들을 질투하기도 했다는 것도. 전부, 전부 서러웠다. 서러움에 눈물이라도 날 거 같아 다보는 멈춰 서서 한쪽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런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녔다. 새벽까지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탓하고 싶지는 않아 한 번도 티를 낸 적은 없지만, 겨울에 장갑도 없이 일하다가 손이 터서 갈라지거나 하면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하지만 한두 번이 아녔기 때문에 다보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얼굴을 가려 파묻고, 5분 정도 지나자, 다보는 “음!” 하고 기운찬 소리로 고개를 들었다. 부은 눈가를 식히듯 찬바람을 피하지 않고 맞으며 몇 번 눈을 깜박였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가 훌쩍 넘어 다음날이 되어있었다. 크리스마스, 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덤덤하게 중얼거리며 다보는 멈춰 서 있던 발걸음을 다시 떼었다.
‘내일 아침거리가 냉장고에 남아있으려나, 점심은 대충 빵 먹는다고 해도 저녁은 뭐 해먹지.’
다시 서러운 생각이 들지 않게 다보는 최대한 먹고살기 바쁜 현실의 일을 생각했다. 숨 가쁘게 달리며 살다 보면 서러움도 나쁜 생각도 저 멀리 사라진다. 오늘 먹을 것, 내일 먹을 것, 당장에 돈 써야 할 일, 아르바이트 날짜, 축구 연습 등 처지를 탓할 새도 없이 바쁜 일정들을 생각해 우선순위를 정하다 보면 다시 머리가 잡생각 없이 깨끗해진다.
지나가는 연인들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전부 흐릿하게 흘려보내고, 내일 나갈 때는 옷을 더 뜨뜻이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좀 더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빠져나갔다. 사람들도 점차 줄어갔고 한산한 주택가가 보였다. 다보는 미로같이 골목골목 좁게 들어선 집들 사이를 익숙하게 헤쳐나가며 집 앞에 도착했다. 비밀번호를 눌러 집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 앞에 걸어 놓은 우유 주머니가 두둑해져 있어 케이크를 잠시 내려놓고 우유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리본이 달린 선물꾸러미가, 두 개.
빨간 거 하나와, 초록색 하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흔한 카드도 없이 선물만 달랑, 머리맡의 양말이 아니라 문 앞의 우유 주머니에.
다보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 벽에 몸을 부딪치고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아버렸다.
“하하.”
고개를 숙인 채, 내뱉듯이 웃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기분이어서 다리가 풀려버렸지만, 일단은 기뻤다. 기쁘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또 눈물이 나올 거 같아 얼굴을 묻었다. 구차한 자존심도, 버림받은 원망도 제쳐놓고, 일단은 기뻐해도 괜찮겠지. 왜냐면 크리스마스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인생 처음으로 받은 산타의 선물을 바라보며, 다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